여행을 가면 '다시 오고 싶어'가 입버릇인 나지만, 다시 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은 도시들이 있다. 싱가포르, 도쿄, 뉴욕 같은 곳들이 내겐 그런 곳들이다.
처음엔 단순히 ‘볼 게 없나?’라고 생각했는데, ‘볼 거’라는 건 사실 만들기 나름이므로 어딘가 좀 개운치 않았다. 꽤 오랜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서울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신도시’라는 거였다.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뉴욕은 크기가 큰 여의도+삼성동의 느낌이었고(분명 내가 6-70년대에 뉴욕을 갔더라면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을 텐데), 싱가포르도 내겐 서울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도쿄도 마찬가지다. 구석구석 살펴보면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긴 했지만, 다른 여행지들에 비하면 상당히 서울과 닮아 있다.
(사실 바른대로 말하자면 뉴욕이나 도쿄에 있는 게 서울에 너무 많이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래서 왠지 컵도 다르고, 맛도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지만 주문하는 방법이나 메뉴들은 대동소이한 카페 프랜차이즈를 도는 그런 느낌 같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카페에 처음 들어간대도 별로 긴장할 필요 없이 '카페라떼 아이스 하나 주세요'라고 해도 좋고, 메뉴를 살펴보고 주문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도 그렇게 느껴진다. 도시의 역사나 문화는 다르지만 뉴욕이 윌리엄스버그를 소비하는 방식이나 한국이 연남동, 익선동 등등을 소비하는 방식까지 도시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여행에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끼냐 안 끼냐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 스타벅스에 가지 않고, 맥도널드에 가지 않아도 주문 방식은 모두 '글로벌 스탠다드'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익숙함과 낯섦을 오가는 일이라지만, 내가 느끼기에 낯섦을 마주하고 내면의 '익숙한' 풍경을 마주 보는 일에 가깝다. 익숙한 풍경을 보고 낯선 생각을 한다면, 굳이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일상의 일에 가깝다.
완은 다른 신도시에서 태어나서 이 신도시로 이사와 성장했다. 그러나 어느 곳도 고향이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단기간에 기획된 도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워너비 도시 같은 느낌을 풍겼다. 또 그리움을 품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간직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였다. 정체성이나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측면은 있었다. 신도시의 아이들이 세계 모퉁이의 이방인으로 자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완은 생각했다. 완은 차라리 그쪽이 마음 편했다. 이방인으로 살지 않으려 했다면 유학 간 도시에서 훨씬 더 고독했을 것이다. (「스페인 도둑」, 100쪽.)
은희경의 <스페인 도둑>에서 ‘완’은 이렇게 정의된다. 신도시의 아이들. 그리고 세계 모퉁이의 이방인. 마찬가지로 은희경은 신도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느 곳도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도시, 그리움을 품을 수 없는 도시, 정체성,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도시. 신도시 키드들에게 신도시는 기획된 도시일 뿐, 고유한 의미란 없는 공간. ‘세계 모퉁이의 이방인’이라는 은희경식 명명은 ‘신도시 키드’들의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을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이전의 도시가 단순히 서울로 표상되는 농촌의 이분법에 가까웠다면, 신도시는 세계 어디를 가도 동일한 분위기, 동일한 체인점들로 점철된 ‘신도시’의 감각을 대변한다.
신도시라는 공간에서 “우리 아들은 군대에 가도, 외국생활을 해도 세상 어디에든 뿌리를 잘 내릴 거예요. 신도시의 아이거든요.”라는 전언을 이끌어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의 존재 방식과 공간의 풍경을 제대로 환기하는 이 표현은 신도시가 더 이상 군중 속의 고독 혹은 익명성의 소외 양상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각과 마주하게 한다.
신도시는 각 도시별로 특성화된 공간이 아니다. 서로 너무나 비슷해서 그것이 어느 도시이건, 어느 나라에 있건 구분해낼 수 없다. “어느 곳도 고향이라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얼굴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획일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신도시에서 신도시를 전전하는 신도시 키드들은 ‘장소의 고유성’의 상실에 대해 비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의 고유성을 상실한 장소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세상 어디에든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그들만의 특질이 된다. 이방인으로의 삶이 마음 편했다고 말하는 완은 신도시 키드들의 전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신도시가 60년대부터 건설됐으니, 그걸 감안해 계산하면 80년대 중후반 생부터는 신도시에 처음 정착한 부모 세대와 달리 신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파트, 편의점, 오피스텔, 백화점, 고시원 같은 도시 배경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세대. 소설이나 영화 속 배경으로 등장해도 오히려 너무 생활밀착형이라 감흥이 떨어지고, '저게 뭐가?'라고 생각할 세대. 이전의 ‘도시적 감수성’과는 분명히 근저에서부터 다른 ‘신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신도시 키드들이 여행지마다 마주하는 감흥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게다가 나는 종종 내 취향이 놀랍도록 신도시적이고 이도 저도 아닌 플라스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매끈하고 세련된 신도시는 지루하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불편하다. 애써 단점을 다른 매력으로 포장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닌 적당한 여행지를 찾을 때마다 이미 너무 많은 선택지를 소거한 채 시작한 건 아닐까 생각한다. 적당히 이국적이고, 적당히 편리한. 그래서 적당한 감흥밖에는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선택을 해놓고 정말이지 '별로 신선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마저도 신도시적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것도 있다. 신도시의 키드들이 경험한 도시적 체험이 각 도시별로 특징적일까? ‘아메리칸 스탠다드’ 형태의 서비스를 지향하는,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서비스와 환경을 유지하며 떠나는 여행의 맛은 그것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겠지만, 여행의 정의나 개념은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