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업무지시 극복기
상사란...
예고도 없이 뜬금포로 퀘스트를 내려주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언제까지, 정확히 어떤 것에 대해, 분량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지,
표가 필요한가? 사진 자료가 필요한가?
분명 본인도 나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수많은 물음표만 두리뭉실하게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얼른 끝내버리는 수밖에.
무인도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것 같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듯한,
막연한 미션이 내 손아귀에 꼬옥 쥐어진다.
이럴 때 내가 취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포커페이스다.
당황하고 놀라고 짜증 나는 내 속내를 절대 드러내지, 들키지 말자.
바로 지금 이 순간, 신뢰 구축의 시작점에 서 있다.
태연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어 본다.
기한을 말해주면 정말 이건 완전 땡큐,
Lv 10에서 Lv 5로 난이도가 조정된다.
상대방의 다급함과 기대치,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보여야 할 퍼포먼스의 정도가 기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어진 기한을 어기는 건 쉽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그 대단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기한만 지켜도 반 이상은 성공이다.
하지만,
보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충분히 알지 않는가.
정확한 기한을 주지 않으면 "최대한 빨리 해오겠다."라고 대답하자.
하던 일을 제치고, 우선순위를 1순위로 바꿔야 한다.
비상사태다.
관대한 보스를 상상한다면
작은 코, 큰 코 모두 다 다치기 마련이다.
본인도 필요해서 시킨, 그 일에 관대한 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초시계의 시작 버튼이 보스의 마음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눌린다.
딸깍.
보스는 태연한 척, 미션을 받아 들고 떠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 대한 신뢰는 떡락하고 불안은 급등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뭐든 일단 보고할 거리를 만들자.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난도질당하거나, 고쳐야 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보스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반드시 어디까지 왔는지, 내가 지금 이 미션을 1순위로 두고 노력 중임을 알려
신뢰 추락이 보류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마련해 보자.
여러 성질 급한 보스들 아래에서
'일이 어디까지 된 건지, 언제까지 해오겠다는 건지 말을 안 한다.'는 같은 이유로
혼나는 상사를 꾸준히 목격한다.
사람이 바뀌어도 같은 장면이, 암 그렇고 말고. 역사는 늘 반복되더라.
그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고자 배우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상사 눈에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법은 별게 없다.
의구심을 안겨주지 않으면 된다.
중간중간, 그가 궁금해하기 전에 어디까지 왔는지 알리면 된다.
결국 일 잘해 보이는 사람의 핵심은,
그 과정을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고 얼마나 투명하게 공유하느냐'에 있다.
수많은 퀘스트들이 우리를 지나왔고, 또 기다리고 있다.
사전도, 지도도 없이 시작하는 여정 같지만,
하나씩 해낼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경험치가 쌓여간다.
반복되는 미션을 헤치며
나는 조금씩 레벨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