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중에 그래도 꽤 잘 살고 있는 호구
"와, 언니 열 안 받아?"
"ㅋㅋㅋㅋ엉 난 그냥 웃겨."
나는 분노의 역치가 높다.
정말 웬만한 것은 나를 열받게 할 수 없다.
(단, 부도덕과 시민의식의 부재는 예외다.)
태어나기를 화가 좀 없게 태어났나.
나는 이상하게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이상한 상황이, 이 상황 자체가, 이 상황을 만든 상대방과, 이런 상황에 처한 내가. 그냥 웃기다.
물론 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도 화라는 감정이 있다.
다만, 내 안의 화는 대부분 번개가 '번쩍'이고 지나가듯 사라진다. 남들은 "그걸 그냥 넘어가?" 하는데, 나에게는 감정소모, 내 에너지를 들일 만한 일이 아니다.
아무도 못 고친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고치겠는가. 정말 몰라서 이러는 사람이면 알려주면 된다. 나를 위해서는 이 상황을 잘 풀고 빠르게 종결하는 게 최선임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열받을 일'보다 '피식할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등장했던 그분.
그분은 우리 팀에 미션이 주어질 때면 나부터 불렀다.
"말랑이님, 이리 와봐요!"
그리고는 사실 내 일은 아니지만, 또 완강하게 거부할 구실은 없는 일을 맡기셨다.
"왜 자꾸 말랑이님 불러? 웃긴다."
"말랑이님은 짜증 안나?"
"웃어야지 어쩌겠어요~"
또 세상이 나를 테스트하려나 보군.
어쩌겠나, 또 해내야지. 싶었다.
사실, 대신 화내주는 분 또한 본인도 그 상황에 놓이면 화 못 낸다. 후후.
어쩌면 화낼 시간이, 여유가 없어서 일지도.
그래서 얼른 해냈다.
모두의 해피엔딩!
지하철에서 나를 밀어내고 가는 사람은 '급똥인가 봐~' 싶고, 어이없는 말을 던지는 상대를 만나면 그 무논리가 재밌다. '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니!'
그래 맞다, 세상은 넓다.
내게는 대부분의 일이 '세상은 넓고 인간사 다양하다. 그래서 재미있는 세상이다.'로 귀결된다.
재미있게도 행복을 느끼는 역치는 아주 낮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아주 작은 꽃, 뭉게뭉게 한 구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 발걸음에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귀여운 가게와의 우연한 만남, 커피 한 잔과 치즈케이크, 매일 걷는 산책길에서의 계절의 변화, 그리고 퇴근길 이끌고 온 무거운 몸을 씻은 후의 개운함. 그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뜨끈한 순댓국에 소주 한 잔도. 히히.
행복의 문턱은 낮고, 화의 문턱은 높다 보니, 내 하루는 균형이 아니라 거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흘러간다.
화보다 웃음이, 불만보다 사소한 기쁨이 쏟아진다.
물론 때로는 '나 호구인가.' 싶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안다. 나는 화를 참는 게 아니라, 그냥 화가 잘 안 나는 거라는 걸.
그리고 호구치고는 꽤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럼 됐지!
어쩌면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직장에서, 관계에서, 그리고 삶에서.
결국 나는 이렇게 산다.
웬만하면 열받지 않고, 사소한 데서 행복한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