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지금'을 기록하나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뜨거운 계절은 가고, 세어보면 채 며칠이 되지 않을 찰나의 가을이다.
지난여름에는 이상하게 능소화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여름이 왔음을 인지하고 나면 일본에서도 쉬이 보이던 능소화가 왜 이번 여름엔 유독 보이지 않았는지, 어쩌면 능소화는 더위에 지지 않고 피었지만 더위에 지친 내 눈에만 들지 않았던 것인지 여전히 이유는 몰라도 그래서일까, 올해 여름의 일기장이 텅 비었다. 매년 여름의 기록에 자리 잡던 한 가지가 없어진 것만으로 이렇게나 기록할 일이 없는 일상이었나 싶어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능소화라는 꽃은 몇 년 전 여름에 처음 알았다. 빨간 것도 노란 것도 아닌,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오렌지 색도 아니면서 주황색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색의 꽃이었다. 뭐랄까, 꽃이 '피어있다'라는 느낌보다 '매달려있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던 게 첫인상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인 데다가 덥지도 않은지 한여름 태양 아래 피어있는 이름 모를 그 꽃이 이상하게 눈에 밟혀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보냈다.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답장이 왔다. "능소화네, 여름 같다.".
아, 계절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는 네 이름이 능소화구나.
한 번 존재를 인식하고 나니,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능소화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꽃들이 지고 푸른 잎을 자랑하는 그 계절의 틈에 홀로 피어있으니 그럴 만도 했나. 가끔은 멈춰 서서 어떻게 생긴 꽃인가 자세히 보기도 하고, 거의 모든 순간 사진으로 기록되던 능소화와의 첫 만남은 일기에도 이렇게 남았다.
낮동안 태양빛을 머금어 밤에도 빛나는 게 아닐까 싶은 꽃을 만났다.
능소화래, 이름도 예쁘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이번 여름이 유독 힘들었던 이유로 그것의 부재를 꼽을 만큼.
그렇지만 여름을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 능소화의 첫 기록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몇 년 치의 일기장을 열심히 뒤져야만 했으니까. 품이 드는 것들은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여전히 펜을 들고 종이를 넘겨가며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 이 글을 시작하며 몇 권이나 되는 일기장들을 다시 들여다봐야만 했다. 아직도 내가 손으로 일기를 쓴다는 걸 아는 친구는 요즘도 가끔 괜찮은 일기 앱을 발견하면 나에게 보내주곤 하지만 성에 차는 게 없는 걸 어쩌나- 펜을 들고 글씨를 적는 게 나의 매일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아버린 걸.
일기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기록하고 남기는 걸 좋아한다. 요즘은 현생이 바쁘다는 핑계로 빈도가 줄어든 것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지만 스케줄러는 매년 꼬박꼬박 썼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했다. 다녀온 곳에 대한 리뷰를 적는 것도, 공연이나 영화 후기를 남기는 것도 여전히 좋아한다. 한참 유행하던 브이로그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동적인 기록은 정적인 기록과 무엇이 다를까 궁금해서. 영상으로서의 기록을 다시 재생하는 순간, 그 순간에 내가 미처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이 보이고, 좋았던 순간의 기억이 펼쳐졌다. 일이 바빠져 편집할 시간을 잃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았던 기록이다.
이 브런치도 마찬가지이다. '입덕'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일기에 적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과 수많은 일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다 보니 미처 손으로 적기에는 아무 내용도 정리가 되지 않아 시작한 또 다른 기록의 방법이다. 감사하게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가끔 다시 첫 글부터 읽었다며 연락을 주시는 덕분에 나 또한 다시 읽어보곤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다가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첫 글부터 읽어보니 처음에 비해 최근의 글들은 꽤나 감상적인 문장들로 엮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아 보려던 입덕 초기와 어느 정도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의 차이가 만들어 낸 변화일까.
그렇게 다시 나의 글을, 기록들을 돌이켜 볼 때면 그때마다 그 글을 썼을 때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꽤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참 좋다. 나의 과거 어느 시점에 누가 함께였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뿐만 아니라 가끔은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 준다는 사실이 계속 무언가를 기록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기도 하고.
요즘 나의 일기만큼이나 자주 들여다보는 타인의 기록이 있다면 그건 의심의 여지없이 I의 기록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일기를 쓰는 것처럼, I도 I의 지금을 기록한다. 바로 음악으로. 아마도 I의 기록은 어떤 면에서 픽션(fiction)이기도, 논픽션(non-fiction)이기도 할 테지만 곡을 쓸 당시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니 일기와 다를 바가 없지. 스스로도 음악을 본인의 일기라 칭하던 I의 해외 인터뷰에서는 과거 발매했던 앨범과 곡을 설명할 때 그 안에 담겨있는 본인을 'He (그)'로 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I에게도 그 곡들이 과거의 자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서의 기록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어느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던, 죽을 만큼 행복해서 그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곡을 쓸 때에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끝없는 방황을 노래한 곡을 썼을 때에는 어떤 미로 속에 있었을까. 감정은 사치이고 침묵이 편하다 느꼈던 시절의 누군가는 어떻게 그날들을 흘려보냈을까. 그러다 그 반복 속에서 더 이상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두렵지 않게 되기까지 어떤 깊이의 심연을 마주했을까.
마냥 멜로디와 비트가 좋아서, 가사가 마음 어딘가에 박혀서 계속 듣던 곡들이 I가 쓴 곡이라는 점에서 유독 더 깊이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기록'으로서 다시 들여다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곱씹다 그 곡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날들의 '나의 기록'이 남을 때면 자연스레 I의 곡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그 곡을 들었을 때에는 반대로 어느 날이, 그날의 감정과 내가 떠오를 때도 있고. 존재를 인식한 뒤로 빠짐없이 나의 여름을 기록하던 능소화처럼, 그렇게 또 다른 의미의 능소화를 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스스로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일기나 글 같은 기록이 아니더라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에 게시물을 남기는 것처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저 어떤 형태이든 일상을 기록하는 것으로 어떤 순간의 '나'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이 다시 돌아보고 싶은 '나'이든,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이든 결국 그 모든 순간이 '나'일 테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 기쁨이 그려낸 라일리도, 불안이 그려낸 라일리도, 결국 '라일리'라는 존재의 어떤 일면이었던 것처럼.
비록 이번 여름의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떠오르는 걸 보니 내 기억 어딘가에 피었던 능소화가 올여름에는 기록을 되짚으며 다시 피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위에 졌을지언정 너는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더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더위 따위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듯. 실제로 만나지 못해 그저 떠올리기만 할 뿐인 지나간 더운 계절의 꽃은 감히 짐작컨대 다른 해들의 그것보다 더 뜨겁고 더 치열하게 피었을 것이다.
다만 올여름, 나의 기록에는 그 꽃 대신 다른 기록이 남았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만으로 괜히 나도 어떤 도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그걸 또 보란 듯 해내는 누군가를 보면 더없는 자신감까지 생기니 이상한 일이지.
너는 알까, 네 꿈과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네가 나를 어떻게 살아가게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면 나의 이번 여름에는 능소화의 기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모양으로 남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과 똑같이 치열하게 피어났고, 마찬가지로 여름 내내 눈에 밟혔으니까. 아마도 올해 여름을 떠올리면 이제는 이 여름 내내 기록된 I의 도전들이 능소화처럼 떠오르다가, 그로 인해 만들어진 나의 작지만 큰 변화들도 생각나겠지. 여전히 반짝이고, 계속해서 치열할 너로 나를 써 내린 여름의 기록으로서.
그러다 마침내 생각했다.
기념비적인 더위를 뚫고 익숙한 듯 새로운 곳에서 활짝 피어난 네가 어쩌면 올여름 나의 앞에 피어난 능소화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 부디, 모든 여름의 틈에 보란 듯 뜨겁게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