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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Dec 18. 2023

#5 덕밍아웃

엄마, 나 아이돌 좋아해

엄마, 있잖아


  입덕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둘 나의 새로운 취미에 대해 알려갈 때, 마지막까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해외에 사는 데다 한국 핸드폰 번호도 없는 나로서는 한국에서 나의 덕질을 도와줄 사람이 절실했는데, 친구네로 마냥 앨범이나 굿즈들을 계속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족의 도움이 아무래도 필요했다. 엄마 아들에게 부탁하자니 본가에 살지 않아 내가 그 물건들을 찾기가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점에서 남은 선택지는 본가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두 번이 세 번 되고, 세 번이 서른 번이 되었을 때 돌아올 잔소리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성인이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이래로 오랜만에 엄마 앞에서 어린아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이 서른에도 이렇게 아이로 있게 되는 순간이 있다니, 뭔가 잘못을 고백해야만 하는 것만 같은 이 이상한 망설임이 싫다가도 내심 그리운 웃음이 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사야 할 (이라기보다는 사고 싶은) 앨범과 굿즈들은 너무 많았고 일본으로 주문할 수 있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여느 때처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엄마, 근데 있잖아. 나 말할 게 있는데, "

"뭔데?"

"나 좋아하는 가수가 생겼어."

"누군데?"

"아이돌이야, 그룹 X라고."


  그게 누군데,라는 예상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그룹 X나 그 멤버들에 대해 알지 못했고 나는 당장에 그들을 '아이돌'이라는 단어 이외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나무위키 링크라도 보내 줘야 하나, 아니면 얼마나 괜찮은 가수인지 읊어야 할까, 의미 없는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갔다. 그렇지만 뭐라 정리할 말을 찾지 못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나에게 엄마로부터 예상 시나리오에 없던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 건 대학 가서도 할 수 있어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가 밴드를 만든다며 와서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배우면 어떻겠냐고 물어봐 주었던 적이 있었다. 노래를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 기타를 칠 줄 알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너무 재밌을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 음악실에서 그 친구의 삼촌에게 기타와 베이스도 배우고, 연습한 곡으로 학교 축제에서 공연도 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설레고 들뜰 수가 없었다. 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나는 축제에서 공연도 하고 친구들에게 환호도 받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하교 후 학원까지 다녀와서 엄마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냥 한다고 하기에는 어린 나의 방과 후 스케줄은 생각보다 빡빡했고, 그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허락이 필요했다. 크게 힘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이면 뭐, 엄마도 괜찮다고 하겠지. 그런데 어린 나의 생각과는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대학 가서 해, 대학 가서. 그런 건 대학 가서도 할 수 있어.

  한 이틀 정도를 시도 때도 없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이틀씩이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너무 속상하고 어쩐지 억울했다. 아니, 내가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것도 못해? 대학 가서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난 지금 하고 싶다고! 그러니 엄마에게서 나의 덕질을 인정해 주는 것만 같은 대답이 나왔을 때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이 서른에 무슨 아이돌이야,라고 할 것만 같았는데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게 좋은 일이라니. 물론 엄마가 뭐라고 한다한들 그만 둘 건 아니었지만, 막상 긍정적인 답변을 얻고 보니 어리둥절했던 그 기분은 지금에도 글로 정리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미묘했다.




맞아, 좋은 일이야


  이후로는 모든 것이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엄마는 내가 한국으로 배송시킨 모든 앨범이나 굿즈를 대신 받아주었고, 때로는 그것에 대해 궁금해했으며, 내가 떠드는 그룹 X나 I에 대한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주었다. 종종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라는 뉘앙스의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타지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딸이 위안으로 삼을만한 무언가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도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일이 힘들다던가, 가끔은 오랜 해외생활에 외로움을 느낄 때에 그룹 X가 줄 수 있는 위로와 그들이 이어준 사람들과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느낀 걸까. 나의 덕질은 이렇게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으로서 엄마에게 인식되어 종종 엄마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엄마가 나에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게 왜 좋은 일이라고 한 건지, 내가 지금까지 이해했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서로 회사에서 있었던 힘들었던 일, 그냥 속상했던 순간, 아쉬운 것들을 주로 이야기하던 엄마와 나의 대화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훅 하고 끼어들었는데, 이게 또 신기하게 대화가 되는 거다. 엄마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새로운 취미가 다시금 엄마와 내가 서로의 지금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아, 정말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의 세상에 깊이를 더하는 것


  언젠가 I가 사랑이 나를 세상과 이어 줄 것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사랑이 이어주는 세상은 비단 새로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같은 하늘도 맑은 날, 흐린 날, 해가 뜰 때, 질 때 다르듯,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도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하고 그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다른 색이 입혀진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 그 안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취향에 대해 나의 오랜 인연들과  이야기하는 것, 그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의 취향까지 발견하는 것. 그렇게 사랑을 통해 세상과 이어진다는 건 어쩌면 나의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고 싶다. 이렇게 무언가를 통해 다시금 알아가는 나의 세상에 오랜 시간을 들여 깊이를 더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세상에 깊이를 더하며 그 취향의 색도 진하게 입히겠지. 그러면 마침내 나는 또 좋아하는 것들과 닮아 갈 나의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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