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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Feb 24. 2024

#7 현실의 벽

덕질에 쓰는 돈과 나의 마음은 비례하나요?

뭐가 이렇게 많아?


  약 10여 년 만에 다시 시작한 덕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아이돌 덕질이 마음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취미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라는 지금의 신분이 나를 조금 안도하게 했으나 현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내가 그룹 X에 입덕하기 전, 친구 B와 후배 C 덕에 이 아이돌 덕질의 세계를 잠깐 엿볼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B는 그룹 S의 팬인데, 거의 5년 이상을 그룹 S와 함께하고 있는 오래된 팬이다. C는 B에게 일명 '영업'을 당해 마찬가지로 수년간 그룹 S를 좋아했다. 몇 년 전, 이 둘이 앨범을 개봉하는 것, 즉 '앨범깡'을 함께 하자고 해서 마침 할 일이 없던 나는 친구네로 갔는데 이게 웬 걸,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 한편을 가득 채운 앨범의 양이 내가 생각한 정도가 아니었다. 수십 장의 앨범이 쌓여있길래 이게 뭐냐며 물어보니, 다 같은 앨범이지만 버전이 다르다더라. 그러니까 내가 10년 전쯤 어떤 가수의 앨범을 샀을 때는 같은 앨범이라고 해도 종류가 하나 내지는 두 개 정도뿐이었는데, 요즘 발매되는 아이돌 앨범은 멤버 수만큼의 버전이 발매되고, CD의 형태가 아닌 앱을 사용하여 재생하는 POCA/Khino 앨범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앨범들도 나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멤버가 5명인 그룹이 있다고 하면, 단체 앨범 버전 4종/멤버 개인 커버 쥬얼 앨범 (흔히 아는 그 CD 케이스에 든 앨범) 5종/키트 앨범 1종 이런 식으로 하나의 앨범에 거의 10개의 다른 실물 앨범이 나오는 것이다. 앨범 하나당 평균 가격을 15,000~20,000원 정도로만 잡아도 이미 모든 종류를 사려면 15만 원~20만 원이 드는 셈. 돈을 벌 만큼 벌어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친구에게 앨범을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물어보니 말없이 앨범을 한 장 뜯어 그 안에 든 구성품을 보여주는데, 나는 거기서 개미지옥을 마주했다. 바로 포토카드. 무려 멤버 개인의 셀카로 구성된 포토카드가 랜덤으로 앨범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앨범을 이렇게 많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물론 앨범 판매량이 가수의 성적에 반영되어 내 가수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이 포토카드의 영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다. 발매된 모든 버전의 앨범을 사더라도 그 랜덤으로 포함된 포토카드에 내 최애 혹은 갖고 싶은 포카 (흔히 '갈망포카'라고 한다)가 있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기에, 내 손으로 갖고 싶은 포토카드를 뽑고 싶은 팬이라면 그 포토카드가 나올 때까지 앨범을 사게 될 테니. 물론 포카마켓처럼 앨범 없이 포토카드만 사고팔 수 있는 플랫폼이 등장했고, 그런 플랫폼에서 원하는 포토카드만 거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내 손으로 원하는 포토카드를 뽑는 것과는 아무래도 그 만족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포카는 종이다, 나는 포카의 종이다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지. 앨범에 포함된 포토카드 이외에 판매처 별 특전, 즉 미공개 포토카드 (이하 미공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게 또 팬들의 지갑을 여는 데에 한몫한다. 미공포란 앨범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앨범을 판매하는 판매처에서 주로 팬사인회 등의 이벤트와 함께 증정하는 앨범 구성품에 포함되지 않은 포토카드를 말한다. 이 미공포는 앨범 구성품 포카와 다르게 딱 그 시기에, 그 판매처에서 앨범을 사야지만 가질 수 있는 포카이기에 희소성의 측면에서 판매처로서는 꽤나 괜찮은 마케팅인 것에는 틀림없을 테다. 그래서 팬들은 공식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앨범만 살 수가 없다. 아티스트가 이 앨범으로 몇 번의 팬사인회 등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벤트에 지쳐갈 무렵 ‘레전드’라고 불리는 미공포가 등장하기도 하니까. 그러다 보니 포토카드를 모으는 팬이라면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이 미공포들을 무시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마저도 이 포토카드라는 게 앨범에만 포함되어 있으면 다행이다. 앨범뿐만 아니라 각종 굿즈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광고하는 제품이 있기라도 하면 또 비정기적으로 새로운 포토카드가 포함된 기획상품이 출시된다. 그 모든 것 또한 특정 기간에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소비 심리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후일에 포토카드만 따로 거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포토카드 한 장이 앨범이나 굿즈 가격을 웃도는 경우도 있기에 '언젠가의 내가 어차피 살 것 같다면' 판매 시기에 사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안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지금’ 내 지갑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을 뿐.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흔히 '돈 먹는 취미'라고 불리는 것이 두 개가 있는데 바로 바이닐 수집과 위스키이다. 위스키야 뭐, 수집이 취미라기보다는 마시는 게 좋을 뿐이고 한 병 사다 놓으면 꽤나 오래 마시기 때문에 체감상 꾸준히 돈이 나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사실 이래서 더 문제긴 하다), 바이닐은 이 아이돌 앨범과 꽤나 닮은 부분이 있어서 행복과 동시에 괴로울 때가 있었다. 같은 아티스트의 같은 앨범이라도 몇 년도에 어디서 녹음되었는지, 발매 국가는 어디인지, 12인치 바이닐인지 7인치 바이닐인지, 판 컬러는 어떤지 등에 따라 이미 가지고 있는 판이라고 할지라도 재구매의 이유가 충분하니까. 게다가 구하기 힘든 판일수록 어떻게든 가지고 싶은 마음까지, 돌아보니 닮은 구석이 많다.


  이미 무언가를 사모으던 습관이 있던 사람이라 그랬는지, 단순히 늦게 입덕한 자의 한 같은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룹 X에 입덕을 하고 나서 이들의 앨범을 다 갖고 싶은 마음에 하나 둘 사모으기 시작했다. 데뷔한 지 몇 년이나 된 그룹인 데다, 데뷔 후 딱히 휴식기라는 것도 없이 소처럼 일해온 그룹 X 덕분에 이들이 발매한 앨범의 개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일본에서 사려니 아무래도 ‘수입’ 앨범인지라 가격이 최소 한국의 1.5배 이상이었고, 구하기 힘든 앨범들도 당연히 있었다. 이걸... 언제 다 모아?


  그렇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래도 일본에서 살 수 있는 거의 모든 앨범이 우리 집에 있었다. 그러니 그게 무슨 말이겠는가, 그만큼 돈을 썼다는 뜻이지. 하나, 둘 사모으며 보지 못했던 새 앨범들을 볼 때에는 행복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책장 두 칸을 가득 채운 앨범들을 보는데 갑자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는 그저 책장 한편을 가득 채운 앨범들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고 마음이 든든했지만, 며칠 뒤에는 이걸 언제 다 샀나 싶어 마음이 심란했다. 사놓고 몇 번이나 열어봤지? CD야 가끔 CD 플레이어로 돌려 듣는다고 하지만 앨범은 언제 마지막으로 열어봤더라? 그러다가 또 며칠이 지나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그런 이상한 날들이 이어지던 시기가 가끔 있었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한가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만으로는 팬이라고 할 수 없는 걸까. 꼭 스트리밍을 하고, 앨범을 사고, 팬클럽에 가입해야만 팬이라고 할 수 있나?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을 '팬심'이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아무 관계가 없겠지만 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내 가수'를 계속 보기 위해서는 이 숫자라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앨범 판매량, 스트리밍 횟수, 순위, 콘서트 티켓 매진율, 굿즈 판매량 등 소위 '잘 나가는' 아이돌의 지표가 되어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소비를 하는’ 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돌 산업의 특성상,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팬마케팅’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대부분의 수익이 팬들의 소비에서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판에서 내가 응원하는 가수가, 아이돌이 여전히 '상업적 가치'가 있어야만 나의 '덕질'에도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 테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걸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앨범이든, 굿즈든 그게 무엇이든 계속 뭔가 나온다는 건 여전히 이들이 건재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또 앨범이 나왔으면 좋겠고, 또 콘서트를 했으면 좋겠고, 또 이들의 지금을 기념할만한 무언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서 어떤 확신도 함께 왔으면.

  이들이 아직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우리는 여전히 이들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또 어느 정도 먼 미래의 그들 또한 지금처럼 그들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의 삶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작은 희망이 있다면 팬과 아티스트로서 함께한 이 모든 날들이 나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확실한 행복이었다고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어떤 배움을 위한 소비를 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와 저축을 한다. 그런데 지금의 행복은?


  그래서 나는 나의 지금에 조그마한 행복을 사주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여전히 나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확실한 행복보다는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에 조금 더 신경을 쏟고 있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행복을 주는 무언가 또한 절실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이제는 과도한 지출이 나의 삶을 어떻게 괴롭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회생활 8년 차이고, 감당하지 못할 소비로 만들어 낸 순간의 큰 행복이 미래의 나를 그 이상의 걱정에 허덕이게 할 것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안다. 모방 소비는 끝없이 경계하며 온전히 나의 행복에만 중점을 두고 나의 삶과 행복의 밸런스를 잘 맞춰 나가야지. 그렇게 작은 행복을 자주 내 삶에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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