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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Nov 23. 2020

키보드 키보드 키보드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기에, 나는 어째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싶으면 각종 도구에 냅다 잔소리를 해댄다. (프라이팬을 노려보며) 기어이 노른자까지 다 익혀야 속이 시원하니? 반숙이라고 했잖아 멍청아! 라든가 (자명종을 노려보며) 빌어먹을 숙면종.. 그따위 근성으로 누굴 깨우겠다는 거야! 라거나 (갤럭시를 노려보며) 사진에 감성을 좀 담아보라고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자식아! 예나네 아이폰은 헌혈도 한다더라!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뭐 이렇게 못되게 굴긴 하지만, 쓰던 장비를 홀라당 내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럴 금전적 여유도 없을뿐더러, 시원치 않은 결과의 책임을 물으려면 일단 나부터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같은 데다 영영 묻어버리는 게 맞기 때문에.. 사실 나는 내가 잠든 사이 내게 욕을 먹은 물건들이 모여 혁명을 일으킨대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다. 자명종이 혁명의 깃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저 자식은 지가 잘못해놓고 왜 맨날 우리한테 난리야? 확 내일 아침에 깨우지 말아버릴까? 이에 갤럭시가 단두대를 끌고 나선다. 그럼 나는 저 놈이 여자친구한테 차이고 질질 짜면서 써놓은 메모들을 인터넷에 뿌려버릴게! 음.. 이거야 토이스토리의 세상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치만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고, 이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장비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지 못하는 분야가 있는데, 키보드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동안 키보드를 끼고 살아야 하는 일들을 해오다 보니 이렇게 돼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저 그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면 뭐랄까.. 내가 갖고 있는 퍼포먼스의 80프로 정도밖엔 끌어내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마음에 쏙 드는 키보드라고 해서 ㄱ, 을 누르면 보통의 ㄱ, 이 아닌 완전미쳐돌아버린 슈퍼 ㄱ, 이 입력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이 키보드가 아니면 100프로는 좀 힘들겠는데, 라는 미묘한 실감이 있다.  


누군가 내 이런 주장에 코웃음을 치며, 야 키보드가 무슨 상관이니? 나는 25,000원짜리 카카오프렌즈 키보드로 일하는데 연봉이 4억 8천이야, 라거나 야 60년 전에 쓰던 키보드로도 사람들 막 달나라까지 보냈다가 데려오고 그랬는데 엄살은, 이라고 한다면.. 나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시절 NASA에서 TEX shinobi 저소음 적축 키보드로 우주를 연구했다면, 현재 일론 머스크는 화성이 아닌 목성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외쳐본다.


*


내가 처음 키보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군 전역 후 대학교 복학을 앞둔 시기였다. 당시 나는 귀여운 디자인과 더 귀여운 가격에 홀려 구매한 ASUS e200ha라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티끌만한 저장 용량과 넷북급의 빌어먹을 성능에 아주 속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새 노트북을 구입하기로 했다. 이 빌어먹을 노트북으로는 B학점은커녕 C학점 사수도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각종 중고 장터를 뒤져 씽크패드 X230이란 노트북을 중고로 구매했다. X230은 2012년에 발매된 제품이라 당시에도 연식이 좀 있었다. 하지만 20만 원 후반대인 가격도 그렇고 무엇보다 까맣고 투박하게 생긴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CPU가 어쩌고 키보드가 저쩌고 하는 정보들도 잔뜩 쓰여 있긴 했는데, 그거야 뭐 노트북이면 다 달려 있는 거 아닌가 했다. 사실 읽어봐도 그래서 이게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당시의 나는 X230의 디자인이 아니면 안 되는 상태였다. 결국 이번에도 디자인과 가격에 홀려 선택해버린 셈이었지만, 일반 사용자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노트북을 구매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단 이쁜 걸 사놓곤 제발 성능이 충분하길 비는 것이다.


며칠 뒤 기다리던 노트북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노트북의 디자인은 더할 나위 없었다. 룰루랄라 전원을 넣고 조금 기다리자 바탕화면이 떴다. 나는 이제 뭘 시험해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으레 그렇듯 메모장을 켜 손가락으로 애국가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현듯, 뭔가 생소하고 매력적인 감각이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어랍쇼? 나는 키보드를 한번 노려본 뒤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키고 다시 애국가를 타이핑했다. 그리고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동해물과, 아, 백두산이, 이게 바로, 마르고, 제대로 된, 닳도록, 키보드구나.


순간, 내 안에 키보드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나는 그제서야 나의 노트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키보드에 문외한이던 내게 놀라웠던 건, 세상엔 키보드에 거의 미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최상의 키감을 찾아 키보드를 열몇 개씩 갖고 있는 사람도, 멀쩡한 키보드를 열어서 개조하는 사람도, 심지어 키보드를 직접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놀라웠던 건, 나 키보드 좀 안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이 노트북의 키감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비단 내 X230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몇십 년을 이어온 씽크패드 노트북 라인업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구입한 X230보다 그 전작인 X220이라는 노트북이 키감에 있어서만큼은 명성이 더욱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X230 키보드의 명성이 자자하다면, X220 키보드의 명성은 자자자자한 것이다. 이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해보자면, X230(자자)의 전작인 X220(자자자자)까지는 씽크패드의 아이덴티티이자 키감이 끝내준다는 전통의 7열 키보드가 탑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통의 7열 키보드는 X220에 탑재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씽크패드 라인업의 주인이 IBM에서 LENOVO로 바뀌면서, LENOVO에서 출시된 첫 씽크패드인 X230부터는 기존의 7열 키보드 대신 새로운 6열 키보드가 탑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변화에 LENOVO에 대한 기존 씽크패드 매니아들의 반발이 상당히 거셌다고 한다. 물론 이 새로운 6열 키보드 또한 상당한 수준의 키감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매니아들 사이에선 그래도 기존 7열 키보드의 키감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인 듯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바로 X220이라는 노트북을 검색해봤다. 키캡이 빈 공간 없이 꽉 들어찬 7열 배열의 자판이 확실히 좀 더 매력적이긴 했다. 하지만 발열이 심하다는 둥, 발열 때문에 팬이 너무 세게 돌아서 시끄럽다는 둥, 팬이 시끄럽게 돌다 못해 노트북이 이륙해버려 지금도 창공을 비행 중이라는 둥, 성능에 대한 악평이 종종 보였다. 뭐 나는 X230의 키감에도 대만족이었기 때문에, 굳이 성능 하락을 감수하면서 X220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X230를 한 달 정도 사용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더더욱 놀라운(어쩐지 놀라움의 연속이 되어버렸는데) 정보를 접하게 됐다. 씽크패드 매니아들 사이에서 레오킴, 이라 불리는 씽크패드 장인을 통하면 X230의 파워풀한 몸체에 무려 X220의 7열 키보드를 이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참 간사한 게, 지금의 노트북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자 잘 사용하고 있던 키보드에서 점점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레오킴이라는 분에게 연락을 취했고, 내 노트북을 고이 포장해 그분의 작업실로 발송했다.


며칠 뒤 드디어 마개조된(X230의 두뇌와 X220의 키보드를 품은) 노트북이 도착했다.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즉시 찢어발겼다. 그리곤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확인했는데, 와.. 이거야 너무 훌륭했다. 앞서 말했듯 X230의 6열 키보드도 분명 탁월했지만 X220의 7열 키보드는 한 술 더 뜨는 놈이었다. 각진 디자인의 키캡들이 빈 공간 없이 빼곡히 정렬된 모양도 멋졌고, 무엇보다 한층 더 쫀득해진 반발력 덕분에 키보드가 손가락에 촥촥 감기는 느낌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나는 그 폭력적인 키감에 한껏 매료되었고, 그날 밤늦게까지 침대에 엎어져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괜히 타이핑해대다 잠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니 외장 키보드가 필요해졌다. 나는 sk-8855라는 키보드(X220의 7열 키보드를 그대로 떼다가 외장 키보드로 만든 제품)를 구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단종된 지 오래인 데다 꽤 기다려봐도 중고 매물이 나오질 않아 포기했다. 대신 그 제품의 전작이며 모양도 비슷한데 왠지 가격이 저렴한 sk-8845라는 키보드가 매물로 올라왔길래 냉큼 구입했다. 그런데 받고 보니 어랍쇼? 컨트롤키와 알트키 사이에 있어야 할 윈도우키가 달려 있질 않았다. 나는 윈도우키가 없는 키보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어우 좀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윈도우키는 윈도우95가 출시되면서 생긴 키인데, 이 키보드는 그 이전에 출시됐기 때문에 윈도우키가 없는 것이었다. 딱 봐도 오래돼 보이긴 했는데, 새삼 역사가 깊은 키보드구나 싶었다. sk-8845의 널찍한 팜레스트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노트북에 비해 키감이 너무 가벼웠고, 무엇보다 업무 중에 밥먹듯이 쓰는 창정렬 기능을 윈도우키 없이 마우스로만 하려니 너무 불편해서 며칠 쓰다 방출해버렸다.


다음으론 레오폴드 FC600M PD 저소음 적축 키보드를 구매했다. 초등학생 시절 컴퓨터실에 비치되어 있던 키보드를 닮은 외형과 아이보리색의 컬러가 딱 마음에 들었다. 레오폴드와의 첫 만남은 더할 나위 없었다. 기계식 키보드는 처음 써봤는데, 자판을 누르면 느껴지는 부드러운 서걱거림에 역시 인간은 기계의 지배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터미네이터적 감상에 젖어들 정도였다.


하지만 레오폴드와의 동행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나는 원래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손과 발에서 땀이 그렇게나 많이 났다. 업무 특성상 근무 중엔 거의 쉴 새 없이 키보드를 쳐대야 했는데, 레오폴드로는 이게 좀 힘들었다. 레오폴드는 기계식 키보드라 높이가 높은 데다 팜레스트가 없어서 속기를 할 때면 손목을 책상에서 뗀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가뜩이나 땀 때문에 자꾸 자판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어느 정도 힘을 주고 타이핑을 하는 중인데, 팜레스트가 없어 손목까지 바짝 들어 올리고 있으려니 이거야 어깨부터 시작해 피로가 상체 전체로 퍼져 하루 종일 아픈 것이었다. 팜레스트 일체형이었던 sk-8845를 쓸 때는 몸에 별 무리가 없었으므로 레오폴드 높이에 맞는 팜레스트를 구해다 달아볼까 싶었다. 그치만 미끄러운 손가락엔 기계식보단 피치가 낮은 멤브레인 키보드가 그나마 낫고, 씽크패드에 달린 트랙포인터가 굉장히 그립기도 했던 관계로, 레오폴드를 방출하고 전에 매물을 찾다 포기한 sk-8855를 이번에야 말로 다시 구해보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sk-8855라는 키보드는 (명성이 자자자자한) X220의 7열 키보드를 그대로 떼다 박은 형태의 외장 키보드였는데, 오래전에 단종된 주제에 아직까지도 매니아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매물이 잘 나오지도 않았고, 어쩌다 판매글이 올라오면 올라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는 건 물론, 그 게시물의 댓글창엔 거래 불발되면 제발 연락 달라며 연락처를 남겨두는 댓글들이나, 판매 완료 됐으니 제발 문자 좀 그만 보내라는 판매자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밥 먹고 중고나라만 보고 있나 싶은 경쟁자들에게 밀리고 밀리는 세월을 보내던 나는, 어느 날 드디어 한 판매자에게 1등으로 문자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오늘 바로 뵙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판매자님도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그날 밤 10시에 신림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직거래 약속을 잡았다. 9시쯤 퇴근해서 지하철 타고 가면 딱이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키보드를 갖게 된다는 생각에 근무 시간 내내 설렜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직거래에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퇴근할 타이밍을 보고 있던 밤 9시 무렵, 건너편에서 한참 인터넷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선배가 갑자기 내게 일을 잔뜩 준 것이다. 그 선배는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이 그냥 오늘까지만 보내주면 돼~ 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찍 퇴근해~ 라는 말까지 남기고 퇴근해버렸다. 아니 일을 시킬 거면 진작 시키든가.. 오늘이 3시간 남았는데 두세 시간 걸릴 일을 오늘까지 보내라고 하면 나는 언제 퇴근하냐.. 아니 애초에 일이 많아서 9시까지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일을 더 주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나는 벌떡 일어나 웃으며 넵 안녕히 가세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판매자님께서 제발 기분 나빠하지 않으시기만을 기도하며 내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메세지를 보냈다. 다행히 판매자님은 넓은 아량으로 직거래 시간을 미뤄주셨다. 그렇게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그 선배를 저주하며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였다. 정말이지 종종 사무실을 활보하던 그 선배의 갈색 푸들까지 미워졌다.


나는 11시 반이 돼서야 가까스로 사무실을 탈출해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12시 정각, 신림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판매자님을 만나 마침내 키보드를 넘겨받았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키보드가 담긴 쇼핑백을 꼭 끌어안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고시원에 도착했다. 나는 방에 들어와 곧바로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연결했다. 코를 훌쩍이며 메모장을 켜고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타이핑했다. 아, 이건 정말이지 좋았다. 집 나간 인류애도 돌아오게 하는 만족감이었다. 선배를 용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개까지는 봐주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꽁꽁 얼어 있던 손이 녹을 때까지 한동안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그리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새 키보드로 일할 생각에 두근두근하며 내 키보다 약간 짧은 고시원 침대에 누워 새우 모양으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sk-8855 키보드의 오너가 됐다. 그치만 이전에 상상했던 것처럼 일이 막 더 잘 됐는가 하면, 솔직히 그렇진 않았다. 다만 매일 아침 출근해 내가 좋아하는 키보드에 손을 얹으면 왠지 든든한 실감이 들었다. 마치 키보드 쪽에서 이봐 이쪽은 나한테 맡겨! 라고 말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종종 일류 피아니스트마냥 아주 리드미컬하게 키보드를 쳐대고 있자면, 무려 근무 중에 신이 나기도 했다. 그럼 된 거지 뭐.


나는 그 뒤로도 몇 가지 키보드를 더 사들였다. 일렉트로마트에서 나비식 키보드를 만져보고 홀라당 반해 12인치 맥북을 중고로 구매하기도 했고, 대만의 TEX라는 회사가 멤브레인 방식의 sk-8855를 동일한 레이아웃의 기계식 키보드 버전으로 만들어 판매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얼른 펀딩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5월의 어느 날, 퇴근하고 고시원에 돌아오니 주문했었단 사실도 까먹고 있던 TEX shinobi 저소음 적축 키보드가 내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두 제품 다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기에, 나는 어째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싶으면 아 그게 없어서 안 되는 것 같아, 내가 그것만 손에 넣으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해댄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비싼 걸 바라진 않아서 이따금씩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갖기 전에 예상하던 라이프 스타일의 놀라운 변화라든가, 능률의 수직 상승 등이 실현된 적은 거의 없었다. 뭐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안타를 만들어내는 건 꿈에 그리던 배트라기보다는 본인이 쌓아 올린 스윙 실력일 테니까.


손발에 땀을 줄줄 흘리며 일하던 나는, 그렇게 1년 정도 미끌거리다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신기하게도 손발의 다한증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제 나는 손발도 건조하고 시간도 많은 데다 마음에 드는 키보드도 몇 대나 갖고 있다. 만약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이제부턴 꼼짝없이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 그리고 무능력을 탓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내 키보드들의 더할 나위 없는 키감이 과분하지 않은, 정말 딱 그 정도의 뭐라도 되어내고 싶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뭐 해낼 수 있겠지?


그나저나 이번에 나온 맥북 키감이 완전 미쳤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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