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밤을 발견하면 반드시 잔뜩 주워올 것. 이것은 우리 아빠의 오래된 철칙들 중 하나다.
등산로에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계절이 오면, 새벽부터 등산을 떠났던 아빠는 어김없이 밤이 가득 담긴 봉다리를 들고 들어온다. 그러면 나와 티비를 보고 있던 엄마는 아이고 니네 아빠는 대체 왜 저런다니, 라는 인사로 아빠를 맞이하곤, 맨날 갖다 놓기만 하면 다야! 당신이 삶을 거야! 정도의 잔소리를 잔뜩 해댄다. 하지만 결국엔 삶게 주방에 갖다 놔! 라는 명이 떨어진다. 아빠는 네 마님! 하며 밤 봉다리를 얼른 싱크대 옆에 내려놓는다.
엄마는 주방으로 이동해 밤을 삶을 준비를 한다. 동시에 밤에서 영감을 얻은 잔소리들을 계속해서 선보인다. 아니 다람쥐들은 뭐 먹으라고 밤을 자꾸 주워와! 요즘은 산에서 밤 주워 오면 벌금 낸다는데 그거 당신이 낼 거야! 그리고 저번에 주차 딱지 날라온 건 왜 안 내서 맨날 내가 내게 만들어! 당신 일부러 그러지! 우리 엄마의 잔소리 스타일은 먼저 번 잔소리에서 다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잔소리를 이어가는, 말하자면 무시무시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아빠도 이런 상황에 대한 나름의 행동 요령을 갖추고 있다. 아빠는 주방에서 날아드는 엄마의 잔소리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쇼파에 앉아 시루(개)와 대화를 나눈다. 시루야~ 시루는 밤 좋아하지? 아저씨가 시루 주려고 밤 주워 왔네~ 저기 아줌마한테 가서 밤 빨리 삶아주세요 하고 와~ (시루 주방 갔다가 쫓겨나 돌아옴) 아이고 잘했네 우리 시루~ 간식 하나 먹자~ 예컨대 이런 식이다. 그렇게 아빠는 엄마의 화를 살살 돋구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베란다에서 내다 버릴 음쓰, 일쓰를 챙겨 호다닥 외출해버린다. 그리고 그 길로 당구장에 가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부부 관계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거실과 주방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한 편의 숙련된 티키타카를 보고 있는 내 입장에선, 자식된 도리로 상당히 재밌다.
최근 엄마와의 통화에서 엄마는, 니네 아빠가 또 밤을 엄청 주워왔어~ 못 산다 내가~ 라며 공짜 좋아하는 아빠는 대머리가 될 거라고 비난했다. 이에 아빠는, 우리 집안은 탈모가 없으니 아빠도 나도 대머리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머리가 안 빠졌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상당히 안심이 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자취방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 상자에는 내 겨울옷들과 함께 아빠가 모으고 엄마가 삶은 밤 한 봉다리가 담겨 있었다. 봉다리째 냉장고에 넣어놓고 혈중밤콜농도가 낮아진 밤이면 한 움큼씩 덜어다 까먹는 중이다. 재배한 밤이 아니라 그런지 상태가 들쭉날쭉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로는 맛밤, 보통밤, 썩은밤이 2:7:1 정도의 비율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남은 밤들이 좀 더 힘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어떤 작명학적 이끌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밤은 보통 그야말로 밤에 까먹게 된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 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밤을 먹으려면 아무래도 좀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지 싶다. 일단 껍질을 담을 그릇과 티스푼 또는 칼을 준비하고, 최대한 흘리지 않게 조심조심 먹다가, 다 먹고 나면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어느새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가루들을 남김없이 쓸어 모으고, 사용한 도구들은 씻어서 물기가 빠지게 잘 놓아둬야지, 까지 마음을 먹어내야 비로소 밤을 먹을 결심이 생기는 것이다. 아아.. 상상만 해도 그냥 다음에 먹고 싶어지는 게, 대낮의 헐렁한 마음가짐으로는 역시 곤란한 일이다. 간식 하나 먹는 데 이렇게 귀찮아서야..
자취방에서 혼자 밤을 까먹다 보면, 엄마가 밤을 예쁘게 까서 하나씩 입에 넣어주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도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꽤 자주 생각한다. 요즘 들어 유난히 더. 엄마가 까주는 달콤한 밤을 아기새마냥 받아먹던 꼬맹이는 대책 없이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자고 일어나면 면도를 해야 하는, 혹시 저녁에 약속이 있으면 하루에 두 번이나 면도를 해야 하는, 스물여덟 그것도 끝자락에 와 있다. 웬만한 일은 혼자 해내야 한다. 돈벌이도 통신비 납부도 종소세 신고도, 그리고 밤에 관한 일들도.
엄마 아빠는 요즘도 내게 자주 전화를 걸어온다. 그리곤 엄마 아빠가 뭐 도와줄 건 없냐고 묻는다. 내가 이렇게 다 커버렸는데도 그렇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나의 문제는 거의 멸종해버렸다. 엄마가 취업 준비 같은 걸 대신해줄 순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의 물음에 엄청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밤 껍질은 일쓰인지 음쓰인지 또는 온수 매트는 어느 브랜드가 좋은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기도 한다. 사실 나도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괜히 엄마 아빠가 잘 알고 있겠다 싶은 걸 물어댄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다 큰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며 열심히 알려준다. 그런 내용의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으면, 가끔은 그냥 엉엉 울고 싶어진다. 왠지 모르겠다.
오늘의 한 움큼에는 애석하게도 맛밤이 없었다. 부디 내일은 달콤한 밤이 많이 걸려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