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교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친다. 동시에 고3 형들 교실 쪽에서 괴이한 포효가 들려온다. 으어아아! 뒤이어 흡사 버팔로 떼마냥 급식실로 질주하는 수십 명의 고3들. 그 뜀박질의 여진을 느끼고 있자면, 과연 무파사가 저런 데 휘말려 유명을 달리했겠구나 싶다. 뛰지 마라 다친다! 아마 고3 학주 선생님일 것이다. 예에! 아마 여전히 뛰는 중일 것이다.
우리는 급식실 순번 최약체 고1로서 느긋한 저녁 시간을 맞이한다. 아 시간 존나 안 가, 라거나 오늘 급식 뭐냐, 정도를 외쳐대면서 기지개나 켠다. 모두가 느긋한 와중, 최근 슬램덩크를 읽더니 농구에 미쳐버린 한 친구가 농구공을 들고 복도로 튀어나간다. 뛰지 마라 다친다! 아마 방금 나간 선생님일 것이다. 예에! 아마 여전히 뛰는 중일 것이다.
누군가 교실 앞으로 나가 거대한 티비를 켠다. 티비의 부팅음을 감지한 우리는 일제히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본다. 금요일.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티비 앞으로 모여든다. 그렇게 채널은 케이비에스에 맞춰진다. 뮤직뱅크가 한창이다.
우리는 티비 앞에 모여 뮤직뱅크를 시청한다. 평소엔 보지도 않던 프로를 매주 금요일 삼십 명가량의 빡빡이들과 단체로 챙겨 보게 될 줄은 우리도 몰랐다. 한 친구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노래 듣게 좀 닥쳐. 한 친구가 티비 속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쟤 너 때문에 오늘 은퇴한대.
그렇게 뮤직뱅크를 감상하고 있다 보면, 슬슬 급식을 먹으러 떠날 최적의 타이밍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그 최적의 타이밍이란, 고3 고2 형들이 급식실에서 빠지고, 저녁을 먹고 와도 후반부 하이라이트 무대를 놓치지 않으며, 남고생으로서 딱히 매력적이지 않을 라인업이 펼쳐지는 삼위일체의 지점을 의미했다. 우리는 그 미묘한 분기점에서 풍기는 급식 냄새를 맡아내기 위해 굶주린 고슴도치처럼 코를 킁킁대기 시작한다.
웬 남자 가수의 무대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우리는, 무대가 거의 끝나갈 때쯤 다시 희망을 갖고 티비를 주목한다. 다음은 누굴까? 걸그룹? 그리고 무엇보다, 예쁠까? 뮤직뱅크 무대에서 세워놓으면 죄다 뼈도 못 추릴 빡빡이들은 그렇게 티비 앞에서 기대에 부푼다.
앞선 무대가 막을 내리고 카메라가 다음 스테이지를 비춘다. 곧바로 낯선 여자 솔로 가수의 무대가 시작된다. 티비 속 처음 보는 존재의 출현에 우리는 잠시 혼란해진다. 쟤는 뭐냐? 그러나 혼란도 잠시, 우리는 찰나의 시간 만에 각자 판결문을 써낸다. 한 친구가 말한다. 이건 아니지. 다른 친구가 말한다. 뭐가? 니 얼굴이?
가장 앞 줄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 우리 반 대법관. 그는 아직 판례가 없는 가수의 무대를 가만히 지켜본다. 그렇게 몇 초간 심사숙고하던 그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갤 들어 칠판 위의 시계를 확인한다. 그리곤 최종 판결문을 낭독한다.
밥타임이여!!!
대법관의 밥타임 선언에 모두가 괴성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평소엔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방금 시작된 무대를 좀 더 보고 싶었다. 나는 교실 앞 문으로 달려가는 나의 절친에게 외친다.
아 이것만 보고 가게!
절친이 답한다.
안 됨 오늘 탕수육이여!
나는 벌써 복도를 질주 중인 놈에게 오늘 버섯탕수육이야 미친놈아! 라고 외쳐본다. 하지만 나의 외침이 닿지 않았는지 놈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교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낯선 가수의 무대를 마저 지켜본다. 꽤 어려 보이는데 중학교 때 여자애들을 생각해보면 나보다 좀 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가수면 대학생은 됐겠지 싶다. 근데 내 눈에만 귀엽나.. 왜 다 가버리냐.. 아무래도 굶주린 남고생들을 귀여움 하나로 잡아놓기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기 말티즈 정도나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도 세네 마리는 필요할 것이다.
보다 보니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한다. 핸드 마이크를 들고 나온 걸 봐선 거의 라이브로 부르는 모양이다. 발랄한 컨셉의 무대임에도 뭔가 묘하게 비장해 보이는 게, 중간중간에 새어 나오는 사뭇 진지한 표정 때문인 것 같다. 첫 무대라 긴장했나? 그나저나 치마가 저렇게까지 짧아도 되나? 아 바지 입었구나. 엥 손에 든 하트 어디서 나왔지? 아 옷에 찍찍이로 붙여놨구나.
무대가 끝나고 카메라가 다음 무대를 비춘다. 나는 티비를 끄고 썰렁한 교실을 나와 급식실로 향한다. 유 마 부우~ 내게 급식을 줘 한 입만~ 복도를 걸으며 흥얼댄다.
그렇게 나는 아이유를 처음 알게 됐다.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체로 아이유의 등장과 함께 밥타임이 선언됐고, 나는 홀로 교실에 남아 아이유의 무대를 봤다. 지금이야 일단 밥을 먹고 못 본 무대는 나중에 유튜브로 보면 됐겠지만, 그때는 햅틱이 최신 폰인 시절이라 뭘 다시 보려면 그 과정이 상당히 험난했다. 아무튼 Boo, 때는 나 혼자였고 후속곡 있잖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야 아이유 우리랑 동갑이래.
미친 진짜여?
진짜임 93임.
미친 걔는 야자 안 하냐?
가수니까 안 하지.
미친 나도 가수 해야겠다.
빡빡이는 안 될걸.
미친 빡빡이.
근데 서울에 있는 학교는 야자 없대.
미친 진짜여?
머리도 맘대로 기른대.
미친.. 우리 아빠가 주식만 안 했으면 나도 서울 사는 건데.
오 혹시 우리 아빠랑 같은 분인가?
미친놈이.
한참 지나 아이유가 마시멜로우, 로 컴백했을 때는 약간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아무래도 컨셉상의 한계는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쯤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두세 명 정도 생겼다. 제발 같이 보고 가자고 싹싹 빌면 또 한두 명 정도는 추가로 생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티비 앞에 모여 아이유와 거대한 마시멜로우가 나오는 무대를 감상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야 근데 저 인형은 어떻게 빠냐? 내가 말했다. 몰라 아이유가 알아서 하겠지. 다른 친구가 말했다. 니가 저거 걱정할 때냐? 제발 니 체육복이나 빨아. 존나 냄새나.
무대가 끝나고 우리는 느긋하게 급식실로 향했다. 말랑말랑말랑행~ 복도를 걸으며 단체로 흥얼댔다.
*
나는 유독 아이유에게는 나랑 나이가 같은 사람, 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내 생각엔 아마 아이유가 나랑 동갑이란 걸 알게 된 후로, (나랑 동갑인데) 이러쿵저러쿵, 하고 생각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랑 동갑인데) 뮤직뱅크에 나오네, 라거나 (나랑 동갑인데) 드라마에도 나오네, 라든가 (나랑 동갑인데) 나는 왜 이따위지?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대다 머릿속 어딘가에 (괄호 속의 문장이) 새겨져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1 때부터 봐와서 그런가 왠지 연락 끊긴 고등학교 친구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이제 나도 다 커버렸으니 이런 가수는 아마 아이유가 유일하게 될 것 같다.
이건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누군가 나랑 같은 나이면 좀 더 관심이 가는 게 있다. 같은 연도에 태어났다는 게 사실 대단한 건 아닌데도 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린다. 얘는 어떻게 사는지,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들이 막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충 인스타를 보다가도 나랑 동갑인 지인들의 게시물이 올라오면 좀 더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얘는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나 보네, 얘는 로스쿨 다니면서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네, 얘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나 보네 나도 한번 볼까, 등등.
아이유의 새 앨범이 나오면 매번 전곡을 싹 다 들어보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랑 동갑인 사람의 근황이 궁금해서. 솔직히 예전에는 그냥 노래도 좋고 부르는 가수도 귀여워서 들었다. 그러다 왠지 수필처럼 들리는 곡들이 발매되면서부터는 이번엔 또 얼마나 멋진 걸 만들었을지, 와 더불어 나랑 동갑인 이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렇게 군인이었던 스물셋의 나는 암 투에니쓰리 난 수수께끼의 아이유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스물다섯의 나는 아이 라이킷 암 투에니파이브의 아이유를 궁금해했다.
*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슬슬 자야겠다 하던 차에 유튜브에 라일락, 뮤직비디오가 떴다. 맞다 아이유 새 앨범 나온댔지. 나는 뮤직비디오를 클릭했다. 역시 좋았다. 새로 나온 앨범을 플레이리스트에 걸고 이어폰을 꽂았다. 두근두근했다.
노래를 들으며 내일 하려던 집안일을 시작했다. 방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설거지도 하고. 그렇게 얼추 마무리하니 앨범은 한 바퀴를 다 돌아 라일락, 이 다시 재생됐다. 아 노래 좋네~ 어느새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노트북 액정에 비쳤다. 나는 검색창에 아이유 5집이라고 써넣었다. 그리곤 이번 앨범의 소개 글을 읽기 시작했다.
20대의 마지막에 대해 화려한 인사를 예고했던 아이유가 봄 내음과 함께 다섯 번째 정규앨범 LILAC, 으로 돌아왔다.
나는 거기까지 읽었다. 그리곤 그 페이지를 닫아버렸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어폰에선 여전히 라일락,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작별이 이보다 완벽할까.
하이얀 우리 봄날의 클라이막스.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어느 이별이 이토록 달콤할까.
그저 좋은 느낌을 주며 흘러가던 몇 가지 가삿말이 의미를 담은 채 들려왔다. 노래가 끝나고 다음 트랙이 재생됐다. 나는 이어폰을 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유는 자기 20대에 화려한 인사를 건네는구나.
그 뒤로 한동안 그 앨범은 듣지 않았다.
*
내가 고2였던 해, 변방의 아이유는 각종 방송에서 종횡무진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더니, 이후엔 임슬옹과 연합군을 형성해 잔소리, 로 중원에 진출했고, 그 해 말에는 좋은 날, 을 들고 나와 3단 고음을 청룡언월도마냥 휘두르며 국민 여동생 자리에 즉위해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종종 love attack, 이나 rain drop, 을 귀에 꽂고 잠들던 나는, 아이유의 거침없는 맹진에 이야.. 이거 대단한데.. 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아이유의 업적은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유는 국민 여동생을 넘어 국민 가수가 됐고 또 곧 국민 가수를 넘어 국민 뭐랄까.. 아무튼 국민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냥 국민, 정도에 머물러 있던 나는 대선이라도 염두에 둔 듯한 아이유의 맹진에 이야.. 이러다 국보로 지정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었다.
한편, 그때는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고등학생 웅비는 거의 매일 교실 문을 가장 먼저 열었고, 자기 전 공부 시간 타이머엔 대체로 만족할 만한 시간이 찍혀 있었다. 대학생이 돼서는 좀 놀았지만, 군대에 다녀와서는 그래도 꽤 열심히 뭔가를 해댔다.
아이유가 제발 잘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해본 적은 없었지만, 나와 동갑인 아이유가 알아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수록 내 안에도 묘한 믿음이 생겨나갔다. 그것은 나도 아이유처럼 잘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도 어떻게 설명을 못 하겠는데) 정말 그렇게 믿겼다. 손에 만져지는 근거는 없었지만, 그것을 단단히 믿게 만드는 뭔가가 내 안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이대로 가다 보면 뭔가 그럴듯한 게 되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리고 그걸 이뤄내기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는 그런 든든한 감각들이 뭉뚱그려져 어떤 명확한 실감으로 내 안에 실존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하루하루 성장해내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그것이 나를 그렇게 믿게 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일종의 방탄조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누군가의 성취를 부러워했고, 그 부러움은 종종 자괴감으로 변해 내게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 둘러져 있던 방어구는 그 총알들을 훌륭히 막아냈다. 충격이야 당연했지만 치명상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발밑의 구겨진 총알들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딱 기다려 나도 대단해질 거야. 나는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어찌어찌 하고 싶던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1년 반 정도를 버티다 튕겨져 나왔다. 지내던 고시원을 나와 다니던 대학 근처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해보기로 했다. 이번엔 내가 좀 더 좋아하고 잘 견뎌낼 수 있겠다 싶은 일을 해보기로.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아이유 5집을 들었다. 타이틀 곡은 아이유가 자신의 20대에 건네는 화려한 인사였다.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선 라일락,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저 멜로디로 흐르던 가사가 돌연 선명해졌다. 아이유가 자신의 20대에게 느낄 실감이 닿았다. 나는 나의 20대에게 건넬 작별 인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완벽한 이별, 봄날의 클라이막스, 기쁜 일, 달콤함, 그리고 화려한 인사의 가장 반대편에 있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로서는 나의 20대에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넬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했다. 나는 이어폰을 뽑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앨범은 들어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되어내지 못한 채로, 스물아홉의 끝자락까지 떠밀려와 있다.
나를 지켜주던 멋진 실감은 이제 없다. 타인의 성취에 대한 부러움이 자괴감으로 변해 이전처럼 나를 겨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나는 무방비한 채다. 자괴의 총알이 날아온다. 그리고 깊게 박힌다. 나이가 인식될 때마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해대곤 있지만 생각처럼 되긴 어려울 것 같다. 미친 듯이 해도 모자랄 상황에 자꾸만 간편한 자극에 홀려 시간을 허비한다.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은커녕 그저 떠밀려가버리지 않기에도 힘이 든다. 이런 내가 너무 자주 실망스럽다.
*
요즘은 늦게까지 깨어 있다. 제때 잠들지를 못 한다. 자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만족스럽지 못했던 오늘을 만회해보겠다며 밤의 끝을 붙잡고 늘어진다. 잠들지 않는다면 아직 오늘이 정말로 가버리는 건 아니라고 우겨대면서.
그렇게 밤을 헤치다 보면 앞선 오늘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유튜브를 좀 더 일찍 끌 수 있었는데. 일을 좀 더 할 수 있었는데. 헬스 갔다 와서 좀 덜 늘어져 있을 수 있었는데. 후회는 곧 그 크기만큼의 불안감으로 모습을 바꾼다. 내가 보내온 하루들을 적분하면 내일의 내가 될 테니까. 오늘을 이따위로 보내버리면 나는 겨우 이따위인 나로 내일을 맞이할 것이었다. 조급히 이것저것 해본다. 하지만 불안에 쫓겨 시작한 일에는 왠지 집중을 해내기가 어렵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커피만 자꾸 진해져간다.
새벽이 깊어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오래오래 뒤척인다. 나는 서른 전에는 뭐라도 되어 있을 줄로 내심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일방통행로의 초입에는 들어서 있을 거라고. 서른 이후엔 그 길 위에서 쭉 달려낼 일만 남았을 거라고. 그렇게 달리다 보면 서서히 바꿀 차종을 생각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달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 일방통행로의 입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20대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꾸만 머리에 맴돈다. 친구들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아직 아무것도 되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돌아버릴 것 같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바라는 걸 이뤄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성과가 없었던 걸 보면 애초에 나 따위가 해낼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돌아보면 그렇게 열심히였던 것 같지도 않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가 강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온전히 내 선택으로 이 지경에 도착했다. 답답한 마음에 베개를 앙 물곤 숨죽여 소리를 지른다. 심장이 쿵쾅댄다.
불안에 젖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오간다. 내 20대의 끝에서 나의 20대에게 건넬 작별 인사를 그려본다. 아무래도 내가 인사를 건넨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차이는 모양새일 것 같다. 나로서는 절대 끝내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는 후회스러운 하루를 붙잡듯이 내 20대의 끝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안 가면 안 될까. 내가 미안해. 내가 진짜 잘할게.
그러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맨날 잘한다 잘한다 해도 매번 그때뿐이었잖아. 너는 안 바뀌어. 평생 그 지경으로 살 거야.
아니야 진짜 이번엔 진짜야.
병신 새끼. 그러게 일은 왜 그만둬? 같이 일하던 사람 중에 그만둔 사람 있어? 없잖아. 너만 그렇게 특별해? 계속 했으면 돈이라도 모았지. 지금 니가 가진 게 뭐야?
아니 근데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 너도 알잖아.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빌어먹을 놈. 때려치고 나왔으면 다른 일이라도 열심히 하든가. 너 열심히 하는 꼴을 못 봤어 내가.
아니 그래서 이번엔 진짜 열심히 해보려고..
그럴 수 있었으면 이미 했겠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니가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 너만큼 하는 사람들 널렸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니네 부모님 말 들어. 공무원 준비를 하든 뭘 하든.
제발.
이거 놔. 끝까지 찌질한 새끼.
.. 미안.
불면의 상념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나는 침대 위에서 생존 수영을 하듯 뒤척여댄다. 몇 번이나 시도해보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리스트를 뒤적거린다. 한참을 그러다 아이유 5집의 에필로그, 를 누른다. 한 곡 반복을 걸어놓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내 맘에 아무 의문이 없어 난, 이 다음으로 가요.
이 밤에 아무 미련이 없어 난, 깊은 잠에 들어요.
아이유의 숙면이 부럽다.
*
여느 때처럼 가까스로 잠들었던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대학생 때 자주 가던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은 술을 처리할 명분을 찾기 위해, 우리는 각자 출생 연도의 유명인들로 배틀을 시작했다. 지인들이 각자 누군가의 이름을 댔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아이유! 라고 말했다. 지인들은 잠시 고민하다 한 잔씩 마셨다. 실실 웃고 있던 내게 누군가 농담조로 말했다. 아이유랑 동갑인데 형은 왜 그래요? 내가 말했다. 나 아이유보다 잘난 것도 많거든.. 키도 더 크고.. 군필이고.. 다른 지인이 말했다. 야 울 거면 나가서 울어~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술자리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좀 더 얘기를 나누다 흡연실로 향했다.
흡연실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흡연실 문이 열렸다. 나는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흡연실로 아이유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멍하니 아이유를 올려다봤다.
아이유가 내게 말했다.
너랑 동갑이라는 게 창피해.
내가 말했다.
죄송해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