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기분 좋은 꿈을 자주 꾸는 관계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은근 기대가 된다. 그래서 꿈 얘기를 좀 해보자면.
그제 꾼 꿈에서 나는 어느 탐정의 조수 중 하나로,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의문의 복도식 아파트에 방문했다. 현장의 범위가 상당해서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 시체들을 조사하기로 했다. 탐정과 아파트 관리인, 그리고 나와 탐정의 또 다른 조수인 귀여운 여자애가 각각 팀을 이뤘다. 그렇게 조사가 시작됐고,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현듯, 나와 같은 팀인 그녀가 나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음을 깨달아버렸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담당한 시체 대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앗 억 같은 소리를 내며 나에게 겨눴던 연모의 눈빛을 황급히 숨기더니 이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눈이 동그래진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히 인상을 한 번 쓰고선 다시 내 앞에 있는 시체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간 고요한 복도에 그녀의 딸꾹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흐흐흐 웃다가.. 거기서 페이드아웃.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흐흐 헤실대며 현실로 돌아왔다. 잠든 중에도 꽤 오랫동안 흐흐흐 상태였는지 깨어나서도 한참이나 두 볼이 얼얼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이렇게나 무너뜨리다니.. 역시 귀여운 여자애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분명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현실에서 몇 번인가 그렇게 됐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두근거림을 떠올려보자면.. 흐흐흐.
생각해보면 꿈속에서는 어떤 일이든 그냥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의 세계에서처럼 여기는 우주, 라고 말하면 아아 오케이 여기는 우주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언젠가 꿈속에서 지구로 침공해오는 외계인들을 화성과 목성 사이의 길목에서 막아내는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깜깜한 허공을 날아다니며 녀석들과 전투를 벌이던 중 바나나 껍질을 밟고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어라.. 우주에서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진다고? 같은 의문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얼른 다시 일어나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꿈에서야 그런 식으로 흐흐흐, 대긴 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누군가 내게 연모의 눈빛을 겨누고 있다든가)이 일어난다면 역시 속 편히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흐흐흐, 라기보다는 가만.. 뭔가 검은 속내가 있지 않고서야 나 따위를? 이란 의문과 함께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지 않을까. 자칫 주제 파악을 깜빡하고선 아아 오케이 이 여자애 날 좋아하는군, 하며 마냥 헤실대며 지냈다가는 하나의 콩팥으로 여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런 나쁜 사람이라면 분명 제값도 쳐주지 않겠지? 사랑도 잃고 콩팥도 잃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꿈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방금은 예전에 방송국에서 같이 일했던 조연출과 봉고차 맨 뒷자리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꿈을 꿨다. 같은 팀이었을 때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선배들 욕도 좀 했다. 그리고 얘기가 어쩌다 그쪽으로 흘러버렸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기 축구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얘기를 진지하게 나눴다. 그러던 중에 차가 멈추고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면서.. 페이드 아웃.
이 꿈속에서의 도란도란도 참 좋았다.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기도 했지만, 누구랑이든 그런 분위기의 대화를 나눠본 지가 오래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무래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라는 건 꽤 까다로운 조건이 갖춰져야 하니까. 관계가 너무 멀어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도 어색하겠고.. 그 와중에 서로 적당한 호감도 있어야 할 거고.. 각자의 구강 청결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야 하고.. 뭐 하나하나 나열하다 보면 끝도 없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꿈같은 일인 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꿈 없는 잠이 베스트라지만, 이런 식의 달콤한 꿈들이라면 나로서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이면 하루의 초입부터 왠지 자신만만해지는 게 있으니까. 그건 뭐랄까.. 하루를 2루나 3루쯤에서 시작하게 된다는 느낌이랄까.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첫눈에 엄마를 정하듯, 깨어나 처음 마주한 좋은 기분을 오늘의 운세 정도로 여기게 돼버리는 것이다. 눈을 번쩍 뜨고는 흐흐흐 오늘은 왠지 전부 다 술술 풀려버릴 것 같은걸, 하는 마음으로 이부자리를 예쁘게 정리한 후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한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복권을 사들인다. 그나저나 이렇게나 당첨이 안 되는 걸 보면, 남들은 대체 얼마나 좋은 꿈을 꾸며 살고 있는 건지.. 가끔 부럽단 생각이 든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대학생 시절, 동기 녀석이 자기가 요즘 자각몽을 훈련 중이라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루시드 드림, 이라고 꿈속에서 이게 꿈인 걸 자각하고선 꿈을 마음대로 컨트롤해낸다는 건데, 그 비법을 요약하자면 여섯 번째 손가락을 기억하라, 였다.
일단 꿈은 어떻게든 의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 기필코 꿈의 지배자가 되어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잠을 청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꿈속에서 어라 혹시 이거 꿈인가?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쪽 손을 들어 손가락 개수를 센다. 그러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번째 손가락 옆에 너무도 태연히 여섯 번째 손가락이 붙어 있다! 평소에 여섯 번째 손가락 = 꿈, 이라는 등식을 머리에 잘 넣어놓았다면, 그 여섯 번째 손가락을 목도하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꿈의 컨트롤 타워를 인수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일상이 좀 우울했던 탓에 이것을 꽤 진지하게 시도해봤다. 그런데 말이 쉽지 꿈속임을 알아차리는 단계조차도 도무지 진입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도전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세어내고야 말았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어! 미친! 됐다! 뭐 하지! 뭐 할까! 하며 꾸물거리다 그만 현실로 튕겨 나와버렸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더 시도해봤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고, 나의 루시드 드림 도전기는 그렇게 어영부영 끝을 맺었다.
만약 그때 포기하지 않고 수련을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지금쯤이면 날마다 자유자재로 꿈을 꿔내고 있었겠지? 그러면 자는 동안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낼 수도 있었을 거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꿈속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그렇게 고시를 패스해내고.. 그 비법을 담은 책을 출판하고.. 처음엔 국내에서만 화제가 되다가.. 각국으로 번역된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TED에서 강연도 하고..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빌어먹을. 생각하다 보니 엄청나게 아쉬워진다. 하긴 그 시절에야 그런 거 없이도 지금쯤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건너 듣기론, 그때 루시드 드림을 소개해줬던 동기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직전이라던데.. 혹시?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자칫 꿈의 지배자가 되어냈다면 내 성격상 인셉션, 에 나오는 꿈 중독자들처럼 현실에서 도망쳐 자꾸 꿈만 꾸려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이야 어떻든 꿈속에서는 분명히 행복해낼 수 있을 테니까. 이대로 서서히 망해가다 살아내는 게 도저히 힘에 부치면, 그런 식으로 이쪽 세상에서 영원히 도망쳐낼 수도 있겠지. 삶을 등진다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아주아주 달콤한 꿈을 꿔내면서. 꿈은 결국 끝나겠지만 다시 깨어나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 역시 지배자가 되는 편이 나았으려나.
아무튼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여섯 번째 손가락을 기억하세요. 경험상 꿈인 걸 알아차렸을 때 미리 마련해놓은 행동 강령을 착착착 실행시키는 게 관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