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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Nov 29. 2016

귤 폭죽


하루 종일 그저 그런 기분이었다. 표정은 온종일 포커를 쳐댔고, 기분 탓인지 뭘 먹어도 뭘 해도 그저 그랬다. 집에 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했지만, 막상 와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뭐랄까.. 하루가 그저 그럼, 이라는 단단한 상자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오늘과 서둘러 작별해내고 싶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물로 오래오래 샤워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방 안의 형광등을 껐다. 사방의 벽이 사라지자 답답증이 조금 가셨다. 더듬더듬 침대를 찾아 누워 이불을 코끝까지 당겼다. 좋은 기분으로 깨어나길 바라며, 제발! 제발! 제발!


눈을 감았다.


그저 그런 꿈이었다. 좋았다고도, 딱히 악몽이었다고도 말하기 곤란한 꿈. 그저 그럼, 은 꿈에까지 날 쫓아왔다. 녀석은 눈이 밝았다.


깊은 새벽에 눈을 떴다. 전기 매트의 빨간 빛이 최고 단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결에 레버를 끝까지 돌린 모양이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몸이 축축했다. 촉촉했으면 좋았을 텐데.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개운함 대신 온몸이 젖은 폭죽 같다는 실감만이 돌아왔다. 몇 가지 스트레칭을 이어가며 축축한 심지에 불을 댕겨댔다. 불은 좀처럼 옮겨 붙어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심지를 따라 걸어낸 불꽃마저 습기를 잔뜩 머금은 폭약에 그저 삼켜져버렸다. 식어가는 땀이 기분 나쁜 한기를 데려왔다.


핸드폰을 켰다. 단톡방엔 친구의 맥락 없는 한숨이 놓여져 있었다. 조금 뒤 등장한 다른 친구가 마찬가지의 한숨을 보태놓고 사라졌다. 한숨이라면 나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도 나의 한숨을 전송하려다, 그만뒀다. 오프라인의 숨을 거두어 다시 내뱉었다. 땅이 꺼졌다.


편의점에 다녀오려 집을 나섰다. 거리엔 꽁꽁 언 바람이 불었다. 나는 유독 추위에 취약한 편이었다. 잔뜩 움츠리고 다니느라 겨울의 초입부터 온몸이 아팠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면 벌써 멸종했을 거란 농담을 자주 했다.


편의점에 가는 길, 가로등 밑의 한 커플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팔을 풀었다간 다신 껴안을 수 없게 될 사람들처럼 그랬다. 어떤 연애는 모든 것을 끝자락에 가져다 놓는가 보다. 나는 그들을 못 본 척하며 오들오들 걸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안경에 서린 김을 닦아냈다. 소금 맛 포카칩과 카스 작은 캔을 골랐다. 그리곤 편의점을 좀 더 어슬렁댔다. 삼각김밥 냉장고 하단에 낱개 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개에 400원이었다. 딱히 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냉장고를 지나쳐 계산대 앞에 섰다. 그러다 왠지, 잠시만요, 귤 하나를 집어와 계산대에 올렸다.


방으로 돌아왔다. 봉다리에서 카스 캔을 꺼내곤, 봉다리를 거꾸로 돌려 흔들었다. 포카칩이 먼저 낙하했고 귤이 마저 낙하했다. 책상 위에 불시착한 귤이 데에 귤 데에 귤 멈출 듯 말 듯 구르더니, 왠지 내 앞에 와 멈췄다. 마치 자길 먹어보라는 듯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듯이.


귤을 집어 적당히 조물댔다. 껍질을 벗긴 귤이 새삼 예뻤다. 귤을 반으로 갈라 입에 넣곤, 제발! 제발! 제발!


앙 깨물었다.


팡!


달콤함이 폭죽처럼 터졌다.


팡!


환한 귤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팡!


얼굴에 작은 표정이 피어났다.


나는 모처럼 만난 좋은 기분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딱 붙인 채 귤을 꼭꼭 씹었다.


이전의 축축했던 심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타들어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를 따라 걸어오는 불꽃을 꽉 껴안아 팡 터져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앗, 불을 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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