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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Oct 01. 2017

카운터 푸드


일기에 남겨두기도 싫을 만큼 고됐던 하루. 저녁은 정말정말 맛있는 걸 먹어야만 했다. 툭 치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빌어먹을 기분에, 하루의 나머지까지 내어줄 순 없었으니까. 나는 흡사 멕아더의 심정이 되어 저녁 상륙 작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퇴근 경로에서 접근 가능한 메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 메뉴의 지난 필모를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아주 비싼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을 정하듯, 길고 긴 숙고 끝에 오늘의 저녁 메뉴를 결정했다. 이거라면 확실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 시간. 나는 잽싸게 짐을 싸 근무지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자주 가던 중국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간짜장을 주문했다. 누군가 우리 뭐 먹을까, 라고 물으면 내가 가장 먼저 제안해보는 음식이었다. 또 짜장면이냐며 기각당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나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다 말고 주문을 일반 간짜장에서 곱빼기로 바꿨다. 패색이 짙던 오늘의 스코어를 뒤집으려면, 아무래도 맛있는 게 아주 많이 필요했다.


곧 두 개의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하나의 그릇에는 노란빛의 면이 정갈히, 다른 하나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짜장 소스가 넘칠 듯 담겨 있었다. 소스를 면에 전부 붓고 비비기 시작하자 간짜장의 황홀하고 폭력적인 냄새가 풍겨왔다. 문득 선명히 느껴지는 심장 박동에 가슴 속에 심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됐다. 나는 딱 알맞게 비벼진 면발을 크게 한 젓가락 집어들었다. 그리곤 빌어먹을 오늘에게 (마음속으로) 일갈했다. 으하하! 이걸로 역전이다! 이어서, 냠. 


그런데 어랍쇼. 간짜장에서 나선 안 될 묘한 신맛이 혀에 맴돌았다. 소스에 들어 있는 고기가 씹힐 때마다 불쾌한 신맛이 올라오는 걸 보면, 고기가 맛이 간 듯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불어 있는 면발도 힘없이 그저 뚝뚝 끊겼다. 요컨대, 이거야 굉장히 맛이 없었다. 뭐 그럴 수 있었다. 음식이란 게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근데 그게 하필 오늘이었다. 오늘은 그러면 안 됐다. 손에 쥔 젓가락이 길을 잃었다.


갑자기 왈칵 새어 나온 눈물에 눈앞이 뿌예졌다. 씨발 하루 종일 되는 일도 없더니 저녁까지 실패였다. 아.. 이건 정말 너무했다. 눈물을 참다보니 목이 메였다. 목구멍을 열어보려니 눈물이 더 새어 나와 이젠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 안 가득 담긴 빌어먹을 신맛이 나는 간짜장을 어거지로 넘겼다. 그렇게 한 젓가락 먹은 간짜장을 그대로 두고 고대하던 식사를 끝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도망치듯 식당을 나왔다.


바깥엔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눈에 닿자 그렁그렁한 눈시울이 홀로 시렸다. 덕분에 눈물을 참아내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힘들다. 그냥 요즘 좀 힘들다. 끈 하나가 흘러내린 에코백이 어깨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흘러내린 끈을 다시 어깨에 붙들어 매고 터벅터벅 밤길을 걸었다.


그렇게 자취방을 향해 걷던 중,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엄마의 전화였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엄마, 라고 써 있는 화면을 바라보며 한참을 머뭇댔다. 그러다 결국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묻었다. 왠지 여기서 엄마 목소리까지 들어버리면 진짜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고등학생 때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치만 다 커가지고서 길에서 질질 짜면 안 되니까.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코를 훌쩍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머니 속 진동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마저 울어야겠는데. 한바탕 울어버리고 나면 잘 지낸다고 대답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따라 자취방이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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