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 든 도둑

글을 다섯 짓다

by 프로기

photo by You Suk Oh via flickr


방문이 열렸다. 할아버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들어섰다. 심상찮은 기운이다. 할머니는 냉큼 전화를 끊는다.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뭉치도 조용히 서랍장에 넣었다. 할아버지의 성난 모습에 할머니는 저걸 말려야하나, 냅둬야하나 안절부절 하셨다.


“대체 언 놈이야. 어! 누가 남의 밭을 일궈. 누구냐고 그걸 심은게.”


사건은 이랬다. 며칠전 할아버지 논밭에 누가 손을 댔다. 그런데 나쁜 짓이라 하기에 애매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심으려고 했던 모종들을 대신 심어주고 간 것이다.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할 농삿일을 도둑맞은 셈이었다. 사람들은 범인을 찾아 뭐하냐고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생했으니 맘 좋은 누군가가 도와준 거 아니겠냐고 한 소리씩 했다.


“나 쉬라고,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여 천사.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할머니는 쉬고 싶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시절에 열 한 남매의 맏이였다. 농삿일 하나로 동생들을 대학에도 보내고, 장가도 보내고, 손주 용돈도 쥐어줬다. 할머니는 시집을 와서 그 농사를 함께 했다. 당신의 시어머니가 아흔 일곱을 넘기도록 시집살이도 오래 하셨다. 지금도 맏이 노릇을 하고 싶어 농사를 지으신다. 가족은 100명이 넘게 불어나고, 농삿일은 해가 지나도 줄지 않았다.


할머니는 매일 읍내 병원에서 약을 한 박스씩 받아오셨다. 부쩍 몸이 성한데가 없다며 하소연을 달고 사셨다. 할아버지는 들은 체도 안하고 범인을 찾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요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몇 주 뒤에는 누가 베어둔 팥단을 다 털었다. 그런가하면 할아버지가 만든 철제농기구들이 사라졌다. 할아버진 화가 머리 끝까지 나다 못해 시들어갔다. 풀이 죽고, 힘이 없고, 축 처진 채로 다니셨다.


김장 김치를 곧 담가야지 했던 날. 며칠 뒤에 200포기는 넉넉히 들어갈 김장독이 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거의 울 듯 했다. 낯빛이 안 좋으셨다. 이쯤되니, 마치 누군가가 할아버지가 일을 못하도록 해코지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일을 해놓은 매음새도 좋았기에, 당신 인생의 자부심이 무너져 내리신 모양이었다. 어디가서 큰 소리 칠 일은 농삿일 하나 였으니 말이다.


“아이고,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랴. 영감....!!”


할아버지가 그만 쓰러지고 마셨다. 급히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실려가셨다. 응급차에 실려가는 할아버지는 앙상했다. 얼굴이 어둑어둑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 쇠약이라고 했다. 최근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딱히 그럴 일이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엄마! 혹시, 아부지, 농사 못해서 저런 거 아니야?”


할머니는 큰이모의 말을 듣고는 마음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다. 영감, 미안하오. 미안하오. 이 말만 되풀이하면서 할머니가 엉엉 우셨다. 그러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빨리 와달라고 재촉하고는, 할머니는 울면서 할아버지 손을 쓰다듬으셨다.


곧 막내 삼촌이 병실을 찾아왔다. 할머니가 나 대신 말해달라고 했다. 모두들 영문을 몰랐다. 막내 삼촌은 왜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할머니를 대신해서 뭘 설명하겠다는건지.


“아부지. 그게 실은.. 심부름꾼들헌티 돈 주고 2주정도 농삿일을 모두 부탁했어유... 엄니가, 도저히 농사 못 지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셔서.”


할아버지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병실에 있던 가족 모두 놀랐다. 동네를 들썩이게 한, 할아버지의 유일한 존재 이유를 앗아갔던 범인이 할머니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머쓱하고도 미안하신 듯했다. 돌아앉으신 채로 눈물을 연신 훔치셨다.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말없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네. 쉬고 싶으오?”

“당신도 나도 이제 여든이오.”

“농사 아니믄 몸이 아픈디...”

“어휴. 이 실랑이는 언제까지 해야 댈랑가...”


매거진의 이전글1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