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일 차
어제 영시가 잠들고 난 뒤, 아빠랑 그런 얘길 했어. 이제야 세상의 나머지 절반을 이해한 것 같다고. (물론 반박할 구석이 많은 말이지만, 말하자면 그래)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삶에 지친 당신', '가장의 무게', '집에 가기 싫어서 퇴근을 미룬다', '사는 게 쉽지 않다' 등등의 모습들. 이런 것들이 정확히 어떤 마음인 지 이젠 알겠는 거야. 너 하나 태어났을 뿐인데, 엄마가 사는 세계는 완전히 뒤집혔어. 거의 <기묘한 이야기>에 나오는 반대편 세계로 건너 온 느낌이야. 이전에는 어디로 가기로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거나 할 때 오직 고민은 '언제 할까?'였다면, 이제는 '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단다. 시점만 고민하면 되던 청년이 가부를 따져야 하는 부모가 된 거지. 그러면서 하루도 쉴 수 없어. 영시는 매일 눈을 뜨고, 매일 밥을 먹고, 매일 커야 하니까!
엄마도 어릴 땐, 아니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의지만 있다면 엄마의 삶을 멋지게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영시가 자는 동안에 영어도 공부하고, 책도 읽고, 사진도 배우고. 영시를 낳고 나서 살도 빼고, 그간 미뤄온 쇼핑도 하며 엄마도 가꾸고. 이유식도 꼼꼼하게 만들어 먹이고, 영시에게 도움이 되는 놀이도 실컷 해줘야지 했는데. 현실은 매일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고, 틈만 나면 뭔가 먹으면서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게으른 사람일 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게으른 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정말 많은 에너지가 드는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삶에 어떤 여백을 남겨둘 수 없는 거구나. 막연히 퇴근 후에 아이를 놀아주고, 아이를 위해 뭔가를 더 알아보고, 아이의 삶을 가꿔주는 것까지 하는 나를 상상했는데. 그것 또한 무~~~척 어려운 일이겠구나. 한 사람이 하루에, 일생에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꿈 많고 욕심 많던 젊은이가 살아내는 것만 해도 벅찬 시민1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어.
엄마는 아직 아기를 낳지 않은 친구들한테 얘기해. 청춘의 마지막을 열심히 남김없이 즐기라고 꼭! 나이와 상관없이 아기를 낳는 순간 청춘은 끝난다고. 60대도 청춘이라면... 30대에 아기 낳고 청춘이 끝났다가, 60대에 다시 시작되는 걸 거야.
이 모든 얘기는 영시가 30살쯤 되면 나눌 수 있을까. 너무 어릴 때 영시가 이걸 읽으면, 영시를 탓했다고 자칫 오해할 것 같아. 널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을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살 거라고 최근까지도 믿었던 엄마의 오만한 젊은 날을 반성하고, 앞서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길거리에 모든 어른들의 삶 앞에 겸손해지고 있단 얘기야.
보통의 부모가 되어가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