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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기 Mar 06. 2024

돌봄은 깔아주는 게 숙명이라

170일 차



회사에서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려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나 효율적인 회의만큼이나 필요한 것들이 있어. 제때 인쇄할 수 있게 프린트기에 잉크가 잘 채워져 있을 것, A4용지도 걸리지 않게 잘 놓여 있을 것, 회의실에 HDMI 선이 있어 노트북과 TV를 바로 연결할 수 있을 것, 보드마카가 잘 나올 것, 멀티탭이 충분할 것 등등. 업무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하나도 없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일을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거든.


돌봄은 아이나 노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더라구. 잡무로 퉁쳤던 것들이 사실은 그 팀을 잘 돌보는 일이었던 거야. 그리고 돌봄은 엄마나 요양보호사만 잘 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각각의 곳에서 야무지게 하고 있던 일이더라구.


한편으로는 돌봄은 깔아주는 일이라는 게 숙명이라,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해. 성취 성과와는 거리가 먼 데, 성실하지 않으면 가치가 금방 바래버리거든. 회사에서 매일매일 잉크가 채워져 있고 HDMI가 있는 건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다가, 딱 하루 그 자리에 없으면 확 짜증 나버리거든.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해야 이어지는 게 돌봄 같아. 더욱이 그 범위와 정도에 한계가 없거든. 가꿀수록 보다 더 단정해지니까.


영시를 돌보는 일이나 집을 돌보는 일도 마찬가지야. 기저귀, 세제, 휴지, 로션, 계란 등등 온갖 것들이 떨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점검하고 채워 넣어야 하고, 청소기를 매일 돌리면서도 청소기가 닿지 않는 곳도 틈틈이 물티슈로라도 닦아줘야 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이불도 때마다 빨고, 환기도 해두고 곰팡이도 닦고. 어휴 끝도 없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영시가 더 높은 지능을 갖는다거나, 더 행복해지는 일이 아니야! 영시의 삶의 배경이 되는 일일뿐...


영시야 그러니 커서 너는 엄마 아빠를 잘 돌보렴. 헤헤 농담이고. 너는 자라서 스스로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길 바라. 너의 배경들을 단정히 다듬는 사람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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