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 방법이 맞아?
언어 습득과 관련해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라는 게 있다. 언어중추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2세~사춘기까지의 시기 동안(에만) 언어 습득 또는 학습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뇌가 말랑말랑할 동안' 영어를 습득해 두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부담이든 아니든 간에.
어찌 됐든 어릴 때 영어를 잘해 두면 '나중에' 편할 것이다. 그 와중에 네 살, 다섯 살의 나는 정말로 영어를 잘 빨아들였다. <The Busy World of Richard Scarry> 비디오를 몇 번이고 돌려 보며 에이, 비, 씨, ..., 원, 투, 쓰리를 똘망똘망하게 따라 했고, 세븐티, 에이티, 나인티, ..., 나인티 에잇, 나인티 나인 다음에는 뭐냐고 물어서 어른들을 감동하게 했다고 한다. 책상 밑에 들어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책 속의 디테일을 (필요 이상) 기억했으며 맞춤법은 틀린 적이 없다. 미국에 있는 친척 언니에게 영어로 편지를 쓰고 싶은데 안 써져서 화가 났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부모님은 결심한 것이다. 얘에게는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재능을 살려 줘야겠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 왜 그렇게 영어공부를 시킨 거야?
엄마: 네가 잘했으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파닉스(Phonics)를 했던 기억이 나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어린이 영어사전을 필사하고 암기하는 공부가 주어졌다. 귀여운 삽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 컬러 책이었지만 사전은 사전이었다. 그걸 n회독을 했다. 처음에는 단어를 여러 번 쓰면서 외우기, 나중에는 단어마다 제시되어 있는 예문을 쓰면서 외우기. 하루에 두 페이지씩인가 각 예문을 공책에 열 번씩 적고 외우고, 밤마다 퇴근한 아빠 앞에서 외운 예문을 암송하는 테스트를 받았다. 못 말하면 "다시", 틀리거나 버벅거리면 "다시", 완벽하게 한 문장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사전 1회독이 끝나면 아빠는 크게 축하해 주면서 선물을 사 주었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장난감 같은 걸 받았던 것 같다. 동화책 앞 장에 아빠 글씨로 사인과 함께 축하의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건 좋았던 것 같다. 이직 공부를 하는 아빠를 따라 공공도서관에 가서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어른이 된 기분이라 즐거웠다. 반면에 "다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몸이 비틀리고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어린이 영어사전을 떼고 <우선순위 영단어>, <우선순위 영숙어>를 시작했다. 그 책 디자인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상태로 나중에 다 커서도 내 또래들이 공부하고 있는 걸 보고, 처음에는 자부심을 느꼈지만 점점 당황스러워졌다.
덕분에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행운인지 불운인지, 중간중간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영어학원에서 다 같이 응시한 <실용영어> 시험(그게 CeLP였던 시절)에서 고득점과 함께 상을 받은 것이다. 그게 몇 급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뒤로 고등학교 때까지 아빠의 권유로 더 높은 급수의 같은 시험에 계속 응시했다. 차라리 그게 토익이나 토플이었으면 도움이 됐을까? 찾아보니 현재는 PECT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대학생 이상의 영어학습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성인 응시자의 실용영어 능력을 바르고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시험'으로 '사회생활과 다양한 직업분야의 실용적 업무나 의사소통 등'에 대한 실사용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라고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어른이었던 시험장에서, 스피킹 테스트 시험관이 나에게 '이 시험을 왜 보느냐'라고 물었었다. 그때쯤 이미 아무 의욕도 없이 시험장에 출석만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곧 실용영어 응시는 흐지부지됐다. 그 마지막 응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고, 2학년 때부터는 대입을 위한 TEPS 공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의 영어 공부는, 아마 따로 글을 쓰겠지만, 정찬용 선생의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영절하)>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문법 위주의 영어 공부 대신,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메커니즘을 따라 영어를 습득하듯 익히라는 것이다. 그를 참고하여 아주 많은 시간을 영어 습득에 할애했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고, 어딘가 구석구석 잃은 것들도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진짜 대학입시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별로 이야기할 만한 건 없는 것 같다. 결국 TEPS와 JLPT 급수를 가지고 외국어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으니 확실히 도움이 된 것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입학 첫날부터 주어진 영어 원서 전공책을 잘 읽을 수 있었고,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외국에서 살다 온 동기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아주 뒤처지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는데...... 배은망덕한 나는 내 정서에서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찾고 있다. 하지만 더 찾아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