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회복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다면
누구를 원망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누가 잘했고 못했고, 탈출하거나 절연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삶은 계속되고 많은 것이 크게 바뀌진 않지만 나의 마음이 회복되고 바뀌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싶다. 나도 회복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다면.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그 기대를 대부분 현실로 만들어낸 아이였다. 그런 나의 삶은 성취가 가득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아주 평이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심장 안쪽에 들러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은 채 살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던 채로. 지금부터 쓰고 싶은 글은 내가 소위 성공한, 실패하지 않은 애로서 겪은 결핍과 감정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겪고 있는 슬픔, 죄책감, 존재 부정, 수치심 등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아가는 글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했던 것은 공부 잘하는 애, '어떤 사람들과 달리' '자본 기반의 방법이 아니더라도' 좋은 성적을 내는 애였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터무니없는 난이도의 공부를 시켰다. 아이로서 받는 의무교육과정과 추가적인 홈스쿨링급의 공부, 마치 투잡을 뛰는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도 많이 고생했고 헌신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서 쉬는 대신 자식이 한 공부를 체크하는 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부모님 두 분 다 집에서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공부를 지원해주지 않았던 한이 있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난 잘 지낸다. 부모님이 원했던 대부분의 것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외국어고등학교는 떨어졌지만 서울대학교에 진학했고, 고시에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박사학위를 땄고, 아주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핍이 없어 보이고, 그런 나의 내면에 결핍이 있다고 말하는 건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는 어디에나 있으니 특수한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죄책감과 수치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교수 임용이 된 날 스스로를 축하할 수 없었고, 4년이나 뒤에 올 승진 심사에서 혹은 그전에라도 밑천이 드러나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고, 매일매일이 떳떳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 모든 순간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끔은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날만, 물리적으로 더 이상 뭔가 할 수 없는 날의 끝에만, 조금 만족할 수 있었다. 작은 성과가 나오면 당연히 남들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실수가 발생하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흔한 일이지만 번아웃과 경도의 우울증이 따라왔다.
서른 살이 넘어서 부모님 탓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이것은 낫지 않는 슬픔의 기원을 찾아보기 위한 기록이고, 또 몇 달 뒤에 근원을 잊은 채 여러 감정에 시달릴 내가 찾아보기 위한 기록일 뿐이다. 내가 쓸 것들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나열이 될 수도 있다. 열두 살의 내가, 열다섯 살의 내가 뭘 하고 뭘 겪었는지 외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보편성 혹은 공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잘 자란 애'가, 무엇이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화살을 자기 쪽으로 돌린 누군가가... 함께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