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절하의 아이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영절하)>를 아십니까? 문법 공부 위주의 영어공부를 비판하면서 나온, 회화 위주의 영어 습득을 위한 방법론이다. 누가 사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부터 집에 책이 있었고, 어느 날부터 그 안에 동봉된 테이프는 내 공부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은 기억이 안 나지만 5학년 때는 확실히 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중학교 때까지 이 방법의 상위 단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리고 다시 자료를 찾아본 바로는 5단계의 학습 단계가 있었다.
* 1단계: 오디오 파일 (동봉된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그냥 쭉 듣는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반복해서 듣고, 이해가 되는 시기까지 반복한다.
* 2단계: 1단계에서 들었던 테이프 내용을 받아쓰기한다. 내 기억에는 책 뒤쪽인가에 스크립트가 있어서 그걸 보고 받아쓰기한 것을 고치고 또 따라 읽었던 것 같다.
* 3단계: 2단계에서 받아쓰기한 내용 중에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영영사전을 찾아 그 항목을 예문까지 통째로 노트에 필사한다. 그 항목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하이퍼링크를 타고 가듯 또 찾아서 또 필사한다. 나는 "typical"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티피컬]인지 [타이피컬]인지 확인하려고 시작한 영영사전 찾기를 아주 오랫동안 했다. 그때 아주 유행했던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을 나도 썼다.
* 4단계: 위의 1~3단계를 비디오로 반복한다.
* 5단계: 영자 신문 하나를 반복해서 읽는다. 읽는 것이 익숙해지면 모르는 단어를 찾아 받아 적고 다시 낭독한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3단계까지를 했고, 영자신문을 낭독하는 대신 2단계의 스크립트와 3단계의 필사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다시 말해 그 테이프를 정말 질리게 들었다는 것이다. 마이클(Michael)과 배리(Barry)의 가족은 모두 한국 사람일 텐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영어만 쓰기로 한다. 영어 공부를 위해서. 그런데 마이클은 학교에서 사모아(Samoa)에 대한 수업을 듣고 오고 좋아하는 음식으로 앤초비 피자 이야기를 한다. "앤초비?"하고 질색하는 배리 목소리가 너무 웃겼다. (ㅋㅋ) 열한 살, 책상 앞에 앉아서 하루 한 시간 온몸을 비틀며 그걸 들었다. 나와 내 동생, 또래 친척들 모두 이 영어 테이프 듣기 단계를 거쳤다. 받아쓰기까지 모두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은 엄마가 "오늘부터 자연스러운 영어 듣기를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잠에서 깨기도 전 아침에 아주 큰 소리로 그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지금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그 시작 음악이 아주 크게 들렸을 때 나는 정말 심하게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그냥 큰 소리를 들어서인지 또 그 테이프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받아쓰기와 사전 필사(또). 두꺼운 코빌드 영영사전을 넘겨 가면서 스프링노트에 그걸 옮겨 적었다.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음악을 들으면서 했다. 어쨌든 그건 쓴 것이 남으면 공부를 한 게 되니까. 얻은 것은 너무 많은 글씨를 써서 예쁘게 안정된 영어 글씨체와, 잘못된 자세로 펜을 잡아서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과 약간의 변형. 아빠는 밤늦게 퇴근하고 들어오면 내가 어디까지 했는지 매일 확인했다. 안 해서 혼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안 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틈틈이 필사적으로 딴짓을 했다는 건 모르시겠죠. 알았어도 어느 정도는 모른 척해 줬거나.
그 작업들은 초등학생, 중학생으로서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나는 투잡러였던 것이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간식을 먹고 딴짓을 좀 한 뒤에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까지 공부를 했다. 아니, 공부한 것 같은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고 나면 다시 학교에 가고, 어떤 건 학교에서 미리 하기도 하고... 집에 오면 또 간식을 먹고 딴짓을 하고. 그 딴짓은 은밀하거나 사소하게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큰 외출은 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학교가 끝나면 거의 바로 집에 오고, 집에 오면 그때부터 두 번째 작업을 하는 상태가 시작되었다. 어떤 프로젝트의 충실한 피험자처럼.
4단계 대신에는 영어로만 된 비디오를 몇 개 반복해서 봤다. <포켓몬스터: 뮤츠의 역습>을 봤는데 피카츄와 포켓몬들이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웠을 뿐 뭐라고 말하는 건지는 정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동생이 알려주기로는 뮤츠가 "Who am I?"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그런 중요한 걸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니...... <당신이 잠든 사이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같은 영화도 여러 번 봤는데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영어를 배웠다. 정말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습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무언가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형체도 모른 채 그리워하고 있는 무언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