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그린 에버그린
영어공부는 매일 했지만, 내가 정말 집중한 건 딴짓이었다. 나는 충실히 딴짓을 하면서 자라나서 판타지소설과 만화책과 일본 록 음악을 좋아하는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이 mp3 플레이어를 사주었지만 그 안을 일본 밴드 곡으로 채우고 끈질기게 듣고 있었더니 제약이 들어왔다. 일본 문화에 너무 깊게 빠져드는 것 같아서였을까? 어쨌든 어린 시절의 취향 돌잡이는 중요하니까. (덕분에 지금도 J-Rock 사운드에 끌려가는 귀를 가지고 있다.) 아빠가 직접 넣어준 곡들은 비틀즈와 사이먼 앤 가펑클, 수잔 잭슨 같은 음악이었다. 하지만 이미 취향이 굳어져 버렸던 걸까? 아니면 약간 벌 받듯이 듣게 된 곡들이라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64MB 용량의 mp3에 13곡 정도의 골드 팝송...을 넣고 14번째 곡을 몰래 숨겨놓았다. 그 열세 곡 중 하나 정도는 마음에 들었을 법도 한데 나는 정말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은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호텔 캘리포니아 짱이에요)
제이락 밴드를 깊이 파면서 나도 밴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본어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애니메이션을 자막 없이 보고 싶어서 집에 있던 아빠 책으로 일본어 독학을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그래서 앞으로도 영어는 좀 안 하고 일본어를 더 배우고 싶고, 전공은 실용음악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그날 소파에 앉아 있던 부모님과 그 앞에 선 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빠는 크게 실망했다. 혼내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한숨과 함께 "저렇게 영어를 싫어하다니......"라고 했다.
열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또래 애들보다 조금 느렸다. 열두세 살 정도의 마음을 가진 애에게 좀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 반대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니까. 그 시절 영어를 기본으로 하지 않고 제2외국어를 하는 것, 소위 일반적인 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것 (그 와중에 재능이 없거나 애매하다면 더더욱), ... 그 모든 건 결국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공부를 잘해두면 나중에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덕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뭔가 잘못해서 혼난 기분밖에 남지 않았다.
저렇게 영어를 싫어하다니.
영어가 싫어진 내 잘못이었다. 그때 내 첫 번째 직업은 중학생이 아니라 영어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영영사전을 필사하고 소리 내어 읽던 때였다. 방과 후 일본어 교실에는 친근한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재미있는 활동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밴드가 콘서트 음원 안에서 뭔가 말을 하면 선생님이 해석해 주기도 했다. 가사집이 없는 음원은 엉망으로 받아 적으면서 가사를 예상해보기도 했다. 반면에 영어는 일이었다. 그걸 하기 위해, 다른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거나 숨겨두고, 책상과 하얀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때 라디오헤드나 콜드플레이로 돌잡이를 했더라면, 지금의 나도 좀 다른 사람으로 자랐을까? 조금 더 이해받고 조금 덜 외로운 사람으로? 정말 하필 제이락을 잡아 버린 내 탓이었나?
그 뒤로도 달라지는 것 없이 우직한 영어공부가 계속되었다. 딴짓도 계속 몰래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부모님이 황학동 벼룩시장에 데려가서 중고 통기타를 한 대 사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이락 밴드의 타브 악보를 보고 대충 손가락 번호만 맞춰서 따라 쳤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고 싶은 건 결국 다 했던 것이다. 여전히 제이락만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는 JLPT 시험도 봤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밴드에 들어가고 일렉기타도 샀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가 그렇게 아쉽고 불만이다.
넌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
가끔 듣기도 하고 나도 동의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순간순간 허락받지 못한 기분, 죄책감에 시달린다. 모든 것이 공부 혹은 부모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운 일을 앞두거나 실컷 했을 때, 꼭 한 번은 '그래도 괜찮은가?'하고 돌아보는 순간이 생겼다. 어떤 선택을 할 때 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최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뭔가를 할 때 부모님이 탐탁지 않아 하면 나도 마음이 너무 찜찜하고 결국 그 선택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생각하는 사적인 영역에 엄마가 영향을 주는 것 같으면 (통제하지 말라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냥 무던히 넘기려고 애쓴다. 그건 그냥 갈등을 피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도 어떤 선택에서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걸까? 내가 독립적인 어른으로서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책을 읽고 조금 더 나은 사람들의 위로와 조언을 듣는다. 그렇게 즐거운 것을 온전히 즐기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어두운 방에서 문을 닫고 간접조명을 켜고 하이볼을 마신다. 실용음악학원을 알아보려고 기타와 드럼 중 어떤 것을 배울지 고민 중이다. 작은 일이라면, 조금 망해도 괜찮으니까. 이번에는 부모님 생각 말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보려고 한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언젠가는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나를 이루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