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대학원은 고통과 인내와 후회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학교마다, 학과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우리 과 대학원은 서로 선생님보다는 언니오빠친구가 되는 곳이었다. 갓 학부를 졸업하고 어디 경험 쌓을 일도 없이 칼입학을 한 석사과정 1학기 학생에게는 열 살 위의 박사과정 선배도 언니오빠가 되었다. 그게 자연스러웠고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함께 학식을 먹고, 살을 빼자고 캠퍼스를 걷고 샐러드를 만들어 먹고, 마을버스 정류장에 있는 빵집에서 빵을 사 와서 나눠 먹고, 학교 축제가 열리면 장터에 가서 떡볶이며 파전을 먹었다. 교내 걷기 대회도 나가고(경품 탔다) 술도 먹으러 (자주) 가고 심지어는 마장동에 무한리필 고기를 먹으러도 갔다. 공부만 아니라면 너무 잘해주는 언니오빠친구들이 있는 재미있는 사회에 소속된 재미로 다닐 만한 곳이었다.
금요일에는 랩미팅을 했다. 나는 교수님이 너무 좋았다. 1학년 때부터 좋아했던 교수님이라 그 연구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횡설수설 PPT를 만들어 가면 공부도 안 하면서 표지만 화려하다고 한마디 듣는 게 재미있었다(그러면 안 된다...).
오후 랩미팅이 끝나면 선배들과 조금 멀리 있는 단과대의 카페에 가서 호두바나나라떼를 마셨다. 오전 랩미팅을 한 날은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연구실에서 식당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 교수님의 보폭을 따라가기는 어려웠지만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 논문이 안 풀리면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서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많이 마음대로 지내는 사람이었지 싶다. 어려도 너무 어렸군.
연구실 방장을 맡고 있던 선배 A는 논문 읽는 법 익히기, 디버깅, 멘탈 관리, 모니터 받침대 조립, 심지어는 쇼핑몰 항의 전화까지 도와주었다. 선배 B는 (일을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과집중하는 나에게 중간 산책타임과 간식타임을 챙겨 주는, 작고 비싼 디저트를 나눠 주는 언니였다. 선배 C는 1학년 때부터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과 술을 먹고, 주로 뭔가를 털어놓을 수 있게 해 주는 언니였다. 선배 D와 E는 한 세대 위의 판타지소설과 밴드를 좋아하는 나와 취미가 맞아서 여러 가지 자료를 물려주었다. 1학년 1학기 때부터 함께한 동기 F는 내가 모 수업 마지막 과제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진짜 머리가 안 돌아가서) 멱살 잡고 과제를 이끌어 주었다. 선배 G는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는 언니였고, 한국어가 제1언어가 아니면서도 두서없이 쏟아내는 내 얘기를 다 들으며 아쌈밀크티를 사주었다.
학자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서의 대학원 생활은 방향을 잡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그 시간이 올 때까지 대학원을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천방지축 날뛰는 막내 석사(과정)을 보듬어 준 환경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당탕탕 즐거워만 하다가 결국 선배들이 다 졸업하고 나도 박사수료 연구생이 되어 후배들의 코드를 봐주고 논문에 피드백을 주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