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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16. 2016

피로사회 / 나는 그의 '피로사회'에 동의할 수 없다

한병철 <피로사회>



나는 그의 '피로사회'에 동의할 수 없다


책이 참 곱다. 새로 나온 책들의 더미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감격했다. 곧 책을 둘러싼 갖가지 미사여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출신의 학자가 독일의 철학계를 발칵 뒤집었다는 것이 수많은 미사여구들의 집결점이었다. 당시 한국 독서계는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법한 사람도 그가 '하버드대 교수'이며, '전설적인 하버드대 명강'을 펼쳤다는 정보를 통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에게 친근감을 표했을 것이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신비주의적인 시각으로 왜곡해서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를 지적하며 제시한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인들의 이성과 과학문명, 지적 전통을 지나치게 우월하게 여기는 정서이자 관점을 표현하는 술어다. 근대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호되게 당한 이후의 동양은 서양의 척도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한 때 뜨거웠던 <정의란 무엇인가>와 이 책 <피로사회>의 인기는 정확히 그 관습에 빚지고 있다. 


'옥시덴탈리즘'적 태도나 관점을 무척 꺼려하지만 처음 느낀 책 자체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격과 현대 독일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합쳐져 책을 펼치게 되었다. 우선 소개하자면 이 책은 언론이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처럼 현시대를 '피로사회'로 진단하고 있지 않다. 대체 책을 샀다는 사람이나 추천하는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주요 매체의 기자들도 한심할 따름이다. 한병철 교수는 현시대를 '성과시대'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시대의 대안 혹은 다음에 도래할 시대로서 '피로시대'를 잠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성과시대'를 통해 얻어지는 '피로'와 다음 시대로서 '피로시대'를 수식하고 있는 '피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선 소개하자면 이 책은 언론이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처럼 현시대를 '피로사회'로 진단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범과 질서, 엄격한 규율이 지배했던 중세 및 근대 '규율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움직여지는 '성과사회'로 이행된 시대라고 분석한다. 규율사회에서는 권력자가 규율을 정하고 개인들을 노예로서 착취하거나, 자신이 정한 이데올로기 및 목표에 봉사하도록 채찍질했다면, 성과사회의 권력자는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부여한다. 이렇게 말하면 성과사회는 마치 굉장히 진일보한 우아하고 평화로운 사회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규율사회가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된다'와 '~해야 한다'를 강요했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를 강조한다. 성과사회의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 자유로운 사회'에서 정작 자신은 '~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자꾸만 자신 스스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되뇌인다. 모두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안 될까? 마치 유재석과 이적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난 왜 안 되지, 난 왜 안 되지'를 반복한다. 자본은 그런 개인들에게 갖가지 성공학 계론서와 황금의 꿈을 제시하며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사람은 점점 우울과 피로감을 느낄 뿐이다. 


이것은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의 세계다. 미국 사회가 오바마에게 감동한 것은 그가 "유 캔 두 잇"이라고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아메리칸드림'의 부활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아메리칸드림은 부활하지 않았고 -부활할 수도 없었지만- 오바마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아메리칸 드림 사상의 기저에는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의 '프런티어' 정신이 깔려 있다. 이 정신은 한 마디로 '신이 이땅을 너희에게 허락하셨다'는 낙관적 정신승리의 정신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해방 이후 미국이 심어 놓은 '아메리칸드림'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과연 무엇이, 어떠한 상태가 되어야지만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찬사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출생 시의 상태에서 수백, 수천 배의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면 얻을 수 있다. 답은 쉽다. 돈을 많이 벌면 된다. 혹은 권력을 쥐면 된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부와 권력은 비례관계다. 


성과사회의 지배자인 자본은 마치 개인에게 관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이면에서는 매우 확고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성과사회는 '~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을 지닌 수사를 이용하여 자본 그 자체의 생산성 증대를 꾀하고 자신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시키고 있다. 개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과잉경쟁과 과잉학습, 과잉생산, 과잉업무, 과잉유희에 내몰리고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성찰' 및 '반성' 능력은 퇴화된다. 성찰과 반성이 퇴화되면 근원적인 창조, 즉 혁명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적의 효율을 가질 '새로운 상품'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상품'을 창조했지만 근원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인류의 가슴에 '리턴 아메리칸드림'을 심어주었을 뿐.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진단하는 한병철 교수의 시각은 합리적이고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것이 언론과 독서계에서 호들갑스럽게 새로운 인식인 것처럼 광고할 만큼 새로운 시각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도올 선생과의 대담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사유에는 동양적인 것이 함유되어 있다. 독일 철학계에 서양의 언어로 동양적 사유를 제시했다는 것에는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율사회 대 성과사회라는 이분법적 논의 체계가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를 그저 겉으로 드러나 있던 권력자의 규율이 인간 내부로 파고들어 내재화된 또 다른 규율사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중세 및 근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 사회가 제 각기 요청했던 성과에 개인들은 '기꺼이' 응해왔다. 그들이 기꺼이 응하지 않았다면 혁명은 조금 더 빨랐을 것이고, 우리는 기원전에 이미 근대를 맞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 성과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냐 내부에서 솟아난 것이냐 하는 것에 따라 차이를 둘 수도 있겠으나, 역시 근원적으로 무의미하다. 현대사회 역시 '개인이 욕망하는 성과'가 과연 진정으로 그 개인에서 출발했을까 라는 질문을 얼마든지 던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은사로 존경하는 도올 선생님과 한병철 교수가 대담을 나눴다. http://news.joins.com/article/7703653


또한 저자가 논의 종착점에서 피터 한트케의 사유를 빌려 제시하고 있는 '피로사회'라는 개념은 다소 억지스럽고 그 성립과정이 불분명하다. 제시된 바에 의하면 성과사회에서 축적된 부정적 피로감이 어느 임계점에 달하면 한트케가 제시했던 긍정적 피로감으로 변화될 것이며, 바로 그 피로감 속에서 개별 인간은 더 이상의 자기 제어 및 자기 착취를 멈추고 소파에 늘어지듯이 평화로운 휴식을 맞이할 것이다. 인간은 긍정적 피로 속에서 처음으로 진정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것이며, 무의미한 성과 쌓기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며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로감에 휩싸인 이들과 연대하게 될 것이다. 굉장히 낙관적 기대감으로 이 책은 마무리되고 있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폐해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계급적 각성을 통해 혁명을 일으키고 모두가 평등과 진정한 유물론적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지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파한 것과 다르지 않다. 특정한 임계점을 만나면 자연히 역사는 다른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다. 결국, '피로사회'는 또 다른 유토피아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유토피아의 정류장이 어디인지, 그곳을 찾아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친절하지 않다. 


인간의 문명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하면 저절로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결국, '피로사회'는 또 다른 유토피아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유토피아의 정류장이 어디인지, 그곳을 찾아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친절하지 않다. 


물론, 73쪽짜리 소책자에서 위에서 지적한 것들에 대한 대답을 모두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반박에 나선 것은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과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시대를 읽어내는 산뜻한 문화비평서로서는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 역시 그 정도의 의미로 캐주얼하게 써내려간 책일 것이다. 철학서나 비평서를 평소 겁냈던 이들에게는 충분히 권장할만하며, 현대인들에게 매우 유의미한 철학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힐링' 담론은 결국 '웰빙'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근원적으로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성과사회에서의 자기 착취 시스템에 '기꺼이' 종속되려는 사람들을 위한 담론이다. 피로하든 피로하지 않든 언제나 주류 시스템에 '기꺼이' 반대하려는 사람들은 있어 왔다. 우리는 조금 더 귀를 열고 주류의 반대편에서 시대를 진단하려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힐링' 아니다. 정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이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는 그런 시도를 하려는 이들에게 기꺼이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 꿈꾸고 있는가.



2013. 5.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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