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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15. 2016

검은 사슴 / 빛이 새어드는 입구는 어디

한강 <검은 사슴>



빛이 새어드는 입구는 어디


대관령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다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얀 색이었다. 작년 이맘 때쯤 나는 대관령의 양떼목장을 보러 혼자 여행을 떠났다. 가방 속에는 한 권의 소설책이 들어 있었다. 한강의 <검은 사슴>이었다.


책과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가 극장마다 걸려 있을 때였고, 나는 한창 이상은의 <외롭고 웃긴 가게>라는 음반에 푹 빠져 지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어기여 디어라'를 들으며 부산의 보수동 책방 골목을 걷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시 나는 이미 <여수의 사랑>이라는 소설집을 통해 한강 소설가에게 푹빠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책을 꽂아두었지만 읽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은 너무 바빴고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다음 해, 나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곧 파란만장한 사랑에 빠지게 되어 책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오히려 한강의 다음 작품들은 꾸준히 따라가며 읽었으나 묘하게도 첫 장편인 <검은 사슴>만은 읽지 못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된 소설가 한강에 대한 내 애정과 존경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어떤 책을 읽게 되는 데에도 운명적인 시기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2009년에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2010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2011년에는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었다. 2012년에는 인상에 남는 책이 없다. 그리고 2013년. 드디어 <검은 사슴>의 차례가 온 것이다. 처음 책을 산 때로터 14년이 흐른 뒤다. 14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검은 사슴>은 '의선'이라는 여자아이를 찾아나선 두 사람, '인영'과 '명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탄광의 광부들을 10년 동안 찍어온 사진 작가 '장'이 있다. 등장인물 중 중심이 되는 것은 인영이다. 인영은 '나'였다가, '인영'이었다가, 또 '그 젊은 여자'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마음에 다가갔다가 멀어졌다가 하며 거리를 조절한다. 마치 카메라가 한 인물을 클로즈업했다가 줌 아웃을 하고, 갑자기 광각 렌즈로 바꿔 거대한 풍광을 비췄다가 하는 식이다.


인영, 의선, 명윤, 그리고 장. 이 네 인물들의 공통점은 네 사람 모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할 곳이 없다. 특별히 살아가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도 목표도 없다. 그러나 정말일까. 그들에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없을까?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아무런 목표가 없다면 살아갈 까닭이 없는 것일까? <검은 사슴>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한 438페이지의 여정이다.


나는 그 여정을 꼬박 1년에 걸쳐 했다. 438페이지를 읽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하면 누군가는 웃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쉬이 마음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지나치게 깊고 정직했다. 덕분에 2013년을 온통 <검은 사슴>이 자아내는 이미지 속에 붙들려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오래된 이 사진 속의 얼굴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인상 깊은 것은 장이 광석을 채굴하는 갱도 깊은 곳 막장에서 물이 솟아오르며 고립되었을 때의 장면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장은 그때 알았다.

팔에 감각이 없어지고 곧 놓쳐버릴 듯한 순간을 넘어가자, 고통스러운 손아귀로 미미한 힘이 링거액 방울처럼 조금씩 흘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가는 것을 느꼈지만 장은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수면은 어깨까지, 허리까지, 엉치뼈께까지 내려갔다. 그제서야 장은 갱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남은 사람은 임과 장뿐이었다.

물이 정강이께까지 빠져나가는 데에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네 사람의 시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깊은 밤 그 장면을 읽어내려가는 데 마치 내가 그 막장 속에 갇힌 것처럼 숨막힘을 느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경탄을 넘어 존경스러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은 단연코 더 많이, 그리고 더 깊히 읽혀져야 할 당대의 위대한 소설가다.


검은 사슴은 광부들 사이의 설화적 동물이다. 깊은 지하에 살며 평생 빛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검은 사슴은 채굴을 하러 내려온 광부들과 협상을 한다.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뿔과 이빨을 바친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내에 사슴을 배신하고 자신들만 빛의 세계로 빠져나가고 만다. 검은 사슴은 영영 어둠의 세계에 남겨진다.


어둠에 속한 것들, 슬픔이나, 외로움에 속했던 존재들은 끝없이 빛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한 걸음만 더 가면, 한 걸음만 더 가면 희망이 있다고,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허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벽에 부딪힌 그들은 스스로 벽이 되어 고독해지는 길을 선택한다. 소통을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쓸쓸히 전등 하나를 켠다. 그리고는 그 빛에 의지해 더 이상 변화하지 않을 삶을 지켜나가려 한다. 인영이 그렇고, 명윤이 그랬다. 장도 마찬가지다. 의선도 그러려고 했다. 허나 어둠이 깊을 수록, 검은 사슴의 고통이 깊으면 깊을 수록, 빛에 대한 의지는 간절해진다. 그리고 그 의지와 아득한 현실이 충돌할 때 사람은 미쳐버리고 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광화(狂化)와 광화(光化)는 서로 닮아 있다.


어둠이 덮어버린 세상에 정상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암화(暗化)시키는 일이다. 광부들은 삶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이들과 크게 다를까?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쫓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암화된 정상인의 눈에 광인(미치광이)으로 비춰지고 만다.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움츠러들고, 히키코모리가 되고,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는 겨울바다 앞에 나가 선다. 그러나 정작 빛을 기억하는 이들은, 더 나은 세계를 한 순간이라도 꿈꾸어 봤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다. 우리 세계의 진보는 그들의 상처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명윤이... 현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유보시켜야 했던 명윤이 끈질기게 의선을 찾아나서는 것은 곧 자기 안의 빛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다. 그 의지에 인영이 답하고, 인영의 모습에 장이 답한다.


힘을 내라고, 일어서라고 위로하는 말을 건내는 일은 어쩌면 쉽다. 그러나 누군가가 쫓았던 꿈의 가치를, 빛의 소중함을 읽어내고 공감해주는 일은 막막한 우주 속에서 생명이 사는 별을 찾아내는 일처럼 어렵다. 대관령의 두터운 눈 속에 나는 한 시절을 묻어두고 돌아왔다. 그 시절 속에는 사랑했으나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이 결코 실패했기 때문에 묻어두고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정표다. 내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를 거쳐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가르쳐줄 귀중한 이정표다. 스무 살 적의 나는 기특하게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희망없는 삶을 견디는 것도 희망뿐이다."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는 것이 옳겠다. 그래, 지금 빛이 새어드는 입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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