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 <당신의 조각들>
이적의 <지문사냥꾼>과 비슷한 시기에 이 소설집이 나왔을 때 나는 먼저 <지문사냥꾼> 쪽을 집어 들었다. 이적의 음악을 무척 좋아했었다. 특히 그가 쓰는 가사들에 매료된 채로 10대를 보냈던 나였다. 그가 틈틈이 써내려간 소설과 같은 글을 모았다는 <지문사냥꾼>은 이적다운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숱한 소설들을 읽어온 나에게 이적의 소설은 소설로서 가치를 논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많았다. 확실한 건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문사냥꾼>에 대한 실망은 애꿎은 타블로에게 이어졌다. <당신의 조각들> 뒷면에는 이적의 추천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책을 사지 않았다. 타블로의 소설은 그렇게 내게 잊혀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타블로에게 일어났다.
세월이 흘러 어느 헌책방에서 다시 타블로의 책 앞에 멈춰 섰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어온 한 뮤지션의 속내가 궁금해졌던 것일까. 담담하게 책을 뽑아 카운터 앞에서 계산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무심히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침실에 틈이 있는지 항상 확인하곤 한다."
- 안단테 -
첫 문장을 읽고, 미안하지만 이것을 정말 타블로가 썼을까 의심했다. 곧바로 다른 단편들의 첫 문장들을 확인했다.
"쥐 한 마리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마크의 열린 침실 문 사이로 들어와, 바닥에 던져진 셔츠와 한 장의 팬티 위를 가로질러 종이 더미에 올라앉았다."
- 쥐 -
"상상하곤 했다. 지금쯤이면 내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성공했을 거라고."
- 승리의 유리잔 -
"샌드라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잭슨 폴록의 그림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다."
- 우리들 세상의 벽-
"리치몬드 워커는 자신이 위대한 운명으로부터 밀려난 것이라고 느꼈다."
-최후의 일격-
종로 3가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한 청년이 상기된 표정으로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며 어떤 한 페이지에서 멈춰 유심히 바라보다 다시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다 멈추는 일을 반복했다. 서울역에서 내린 후 경의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잠이 드는 순간까지 타블로의 글은 빠르게 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 정도면 이미 프로다. 괘씸하다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일주일에 걸쳐 느긋하게 책을 읽는 나답지 않게 <당신의 조각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서 이틀 만에 읽어냈다. 멈출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있기도 했고, 그가 적어 내려간 문장들에 흠뻑 매료된 탓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진짜였다.
그의 글에는 미국이나 영국 작가들의 소설에서 감지할 수 있는 특유의 가벼운 공기와 위트, 그리고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거기에 타블로만의 독특한 푸른빛 우울감이 더해져 묘한 색채를 띠는 것이었다. 종일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듣고 난 후의 느낌이랄까.
타블로의 재능은 정말 어디까지일까. 이 탁월한 천재가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독보적인 그의 음악만큼이나 그의 글은 독보적으로 빛나는 것이었다. 그가 소설을 계속 쓰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의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 읽을 수 있다면 일상의 재미를 하나 더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의 조각들> 제목마저 지나치게 멋진 이 작품집은 단순히 연예인의 작가 데뷔 서적 정도로 묻혀도 될 정도의 책이 아니다. 그의 조각들이 앞으로 더 많이 우리의 조각들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