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의 근원을 찾아서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 논어 '학이(學而)' 제9장 -
동아시아 문명에서 제례를 지내는 전통은 이 한 구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공자 본인의 말이 아닌 제자인 증자의 말이다. 일찍이 공자는 제자인 증자를 일컬어 "좀 어리석다"라는 한 마디로 평가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가 공자보다 앞서 죽어버린 후, 공자의 맥은 아이러니컬하게 증자에게로 이어졌다. 증자의 이름은 '삼'이다. 공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삼은 공자 사후에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며 '증자(자子는 스승을 일컫는 존숭의 호칭)'로 추앙받으며, 논어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 증자가 위의 말을 했는지, 공자가 한 말을 증자가 한 것처럼 후대의 기록자들이 편집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실제 발언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신종추원, 민덕귀후의"라는 말 속에는 공자의 유학사상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 사계의 중론이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이것은 장례의식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 내가 다루고 싶은 부분은 이다음의 말이다.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이 구절이 바로 제례를 이르는 부분이다. 이 소박한 말 한 마디가 수 천년 간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리라고 공자(혹은 증자)는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렇게까지 짐작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공자가 남긴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조상숭배를 한다는 종교적 비판을 받으면서도 '제례'의 관습을 지켜오고 있다.
제례는 크게 조상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와 명절에 지내는 차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벗어나 타지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게 되는 현대인의 특성 때문에 명절이면 귀향객으로 차들이 고속도로에 사설 주차장을 만드는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대체로 운전을 담당하게 되는 남성들은 운전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제사 음식을 제작해야 하는 여성들은 제사상 차리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어느 때부턴가 현대인에게 명절은 즐거운 축제의 날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면서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 중심에 '제례'가 있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따르고 있는 제례의 풍습은 조선조 양반가에서 주로 행해지던 <주자가례>의 양식이다. <주자가례>를 지은 주자는 13세기 중국 남송 시대의 인물로, 담백한 일상 언어로 표현되어 있던 공자의 사상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성리학(또는 주자학)'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유학의 형태를 창안한 사람이다.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라는 공자의 소박한 말이 주자라는 필터를 거쳐 나오면서 음양오행의 원리니, 이기론(理氣論)이니 하는 복잡한 이론이 더해진 것이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제사상을 차릴 때도 생선 머리는 어느 쪽으로 해야 하니, 전이나 과일은 몇 개를 두어야 하니, 절은 몇 번 하는 것이 옳으니, 몸가짐은 어떠해야 하느니, 여자는 참석을 못하느니 하는 세세한 규약들에 얽매이게 되었다.
이것이 허례허식임을 간파했던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는 공자의 본래 뜻을 회복해 조상을 추모하는 데는 청수(=맑은 물) 한 사발이면 족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실천했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동학교도들은 대부분 최제우의 뜻에 크게 동의했고, 그것은 일종의 제례 혁명이었다. 이미 양반의 신분을 사고팔기 시작한 당대에 벼락 양반이 된 이들은 경쟁적으로 제사상을 으리으리하게 갖추고 사대부가의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고 있었다. 청수 한 사발의 제례는 그런 그들의 허영을 날카롭게 꾸짖는 민초들의 자발적 문화혁명이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동학혁명은 미완으로 그쳤고, 조선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 일제는 동학 문화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양반가의 허례허식뿐이었다.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공자가 이 말을 했을 때는 이 말 자체가 매우 혁명적인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응? 대체 어디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당시는 아직 종교 사회에서 인문사회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았을 때다. 즉, 나라의 지도자가 점을 치거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 등을 통해 신의 의사를 묻고 신에게 간청하는 형태로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신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리얼하게 자리 잡고 있던 시절, 제사라는 것은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위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 제사의 의미를 인간적인 의미로 뒤바꿔버리는 혁명을 감행한 것이다.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공자는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신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이루는 공동체 속에서 덕을 전하는 것에 있다고 천명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다.
건민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고 치자. 만약 이 사람의 생이 죽음으로써 일회적으로 끝나버린다면 건민이는 평소에 덕을 쌓으며 살고자 할까?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만약 건민이가 죽고 난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도가 있다면 어떨까. 건민이가 평소에 악행을 일삼았다면, 건민이를 추모하는 날이 매년 돌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모여서 건민이의 욕을 할 것이다. 죽어서도 편하게 두 다리를 뻗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반대로 건민이가 평소 덕을 쌓았다면 건민이의 제삿날마다 후손들이 모여서 "아, 정말 할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지.", "나도 꼭 아버지 같이 살 거야."라고 말하는 훈훈한 풍경이 연출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죽은 뒤,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 다시 말해 역사에 어떻게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살아있을 적의 삶에 충실하게 된다.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된다는 공자의 말은 이러한 원리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원리는 매우 강력했고, 이후 동아시아 문명의 2000년 이상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만약, 공자가 살던 당대가 오늘날과 같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시대였다면 단언컨대 결코 공자는 여성을 제례에서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아버지의 제사와 어머니의 제사를 똑같이 지냈다. 장자 상속이니, 여자는 절을 할 수 없느니 하는 모든 묘한 풍습들이 모두 공자 이후 어떤 특수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한정적으로 생겨난 일시적 방편들에 불과하다.
그 본(本)을 잃지 않는다면 형식은 시대에 맞게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명절의 풍경을 보면 오히려 거꾸로다. 형식에 맞추느라 오히려 근본을 잃어버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왜 제사를 지내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왜일까? 답은 쉽다. 어른들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양반 흉내를 내고 싶어 <주자가례>를 억지로 따르던 시대의 조선인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떠나간 이를 추모하는 일'이다. 음식을 차리는 일보다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멜론이면 어떻고, 파인애플이면 어떤가. 먼저 간 이가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평소 생선이나 전, 튀김 같은 것은 입에 대지도 않고 떠나가신 분에게 차례상이라고 그런 것들을 올리는 이유는 또 무언가. 음식은 요즘 사람들이 편히 먹는 것들로 간소하게 차리되, 친척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먼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추억하고, 그 기억을 다음의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공자가 바랐던 참된 제례가 아닐까. 증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는 증손남, 증손녀가 몇이나 될까. 고전적 형식미를 갖추는 것은 저 성균관의 명문 사대부가만으로 족하다. 우리 모두가 인간문화제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왜 제사를 지내는가. 질문 속에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