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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17. 2016

알파고의 시대, 제트소년 마르스는 가능할까?

- A.I가 과연 인간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2006년에 써두었던 글을 오늘날 시점에 맞게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알파고의 시대, 제트소년 마르스는 가능할까?

 - A.I가 과연 인간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첫째 가름. 들어가는 군말.


어렸을 적 즐겨보던 만화영화 중에 제트소년 마르스라는 것이 있었다. 붉은 망토를 펼치고 푸른 하늘을 나는 우리의 친구 제트소년 마르스던가? 아무튼 아톰의 먼 친척뻘 되는 그런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지구를 지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국민학생(지금은 초등학생이지만) 시절에 나는 무려 전학을 6번이나 다녀서, 깊이 마음을 교류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늘 곁에 있으면서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로봇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많이 하곤 했었다. 그런 로봇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한때 과학자가 되리라 꿈꾸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과학자와 로봇 사이에는 건너야 할 많은 다리들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과학자가 모든 공학과 과학기술의 분야를 함께 아우르는 줄로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나는 '아톰 세대'가 아닌 '제트 소년 마르스 세대'였다. 이 만화는 1970년대에 아톰의 원작자 데즈카 오사무의 기획으로 제작됐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굉장히 이과적인 아이로서의 인생을 살았다. 혼자 집에서 뭔가를 발명해내겠다고, 집안 집기들을 부수기도 하고, 컴퓨터나 라디오를 분해했다가 다시 붙였다가 하며 놀기를 즐겼다. 지금은 비록 문과계열인 국어국문학과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나는 어릴 적 나의 꿈을 잊은 것은 아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로봇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SF소설 같은 가상의 공간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로봇을 창조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상상력의 바탕을 얻기 위한 것이 내가 ‘인지과학’이라는 수업을 신청한 하나의 동기였다.


어릴 적에는 로봇에 관한 생각의 많은 부분을 아이작 아시모프로부터 얻었다. 그의 로봇 시리즈 소설들은 어린 나에게 적잖은 감명을 주었다. 적어도 건전지로 움직인다는 설정 외에는 인간과 다름없는 제트소년 마르스로부터 인간에 대한 계명을 지니고,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활동하는 로봇으로 인식이 진 일보 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퇴보) 그렇다면 과연 아이작 아시모프가 묘사했던 인간의 충실한 심복으로서의 로봇 혹은 기계 그러한 것도 조만간 가능한 것일까? 혹은 더 나아가 과연 제트소년 마르스는 가능한 것일까?


아이작 아시모프. SF계의 불멸의 거장으로, 문학-과학-역사-철학-수학-경제-지리-정치-종교 등등등 국제도서분류법으로 나눌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가름. 제트소년 마르스, 그 꼬마의 마음?


우선 우리의 마르스가 마음을 가질 수 있냐 없냐를 논하기에 앞서서 과연 그럼 ‘마음이란 무엇이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철학적 명제인 줄만 알았던, ‘마음이란 무엇일까?’ 가 과학적 명제로 대변신을 하는 순간이다. 심리학 혹은 철학에서 '인지과학'으로의 대변신!

*2016년의 첨언 : 요즘은 '인지과학'보다는 '뇌과학'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넘어온 추세. 허나 10년 전에는 인지과학이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분과로서 뇌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로 이 마음을 보는 입장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의 갈래로 나뉘어 왔다. 


그 하나는 1인칭 관점(유리박스) - 마음을 마음 안에서 보려는 내재론의 관점.

또 하나는 3인칭 관점(블랙박스) - 마음을 마음 밖에서 보려는 외재론의 관점.


내재론의 관점에서 본마음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일종의 의미체계, 해석체계를 가리킨다. 그에 반해 외재론의 관점에서 본마음은 철저히 물리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것으로, 뇌의 현상으로서의 어떠한 물리적 반응과 운동이 된다. 이러한 거시적 양론 사이에서 인류는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콰인과 프레게, 브렌타노의 싸움. 또 콰인과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미묘한 마찰. 튜링, 레퍼포트와 설의 논쟁. 이 모든 것이 결국 이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이냐 라는 문제에서 비롯된 다툼이었다. 


2016년의 알파고는 외재론적 마음( = 인식 중심, 기계적 마음)의 총체다


외재론과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면 기계가 마음을 가지는 문제는 매우 간단해진다. 자연언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기계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재론의 쟁점은 '인식 능력'이다. 마음을 인식 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즉, 외부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자극에 합리적인 반응을 할 수 있으면 마음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 


그렇다면 그러한 외재론으로 제트소년 마르스를 제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의 신경회로망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외부 입력에 대해 보다 자연스러운 반응을 하기 위해서는 퍼지이론 역시 좀 들어가야 할 것이고, 또 이성적인 활동 외에 감성적인 활동을 담당할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렇다 치고 감성은 어떻게 환경설정을 해야 할까? 슬프면 울어라, 짜증이 나면 화를 내라. 그러면 어디까지의 환경이 슬플 환경이고, 또 짜증이 날 환경일 것인가? 인간의 감성은 그저 퍼지이론으로 때우기에도 복잡한 면이 많고, 무엇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감성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봉착하게 된다. 뭐 그럼 자, 일단 그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했다 치고 외재론에 입각한 제트소년 마르스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마르스는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의 슬픔을 공유하고, 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적극적인 어드바이스를 해준다.(마치 엠에센의 심심이처럼. 혹은 2016년의 '시리'처럼) 그렇다면 이 마르스는 과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설의 중국어 방 테스트처럼 공허한 기계언어의 입출력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시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러한 외재론의 마르스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우 정밀한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과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언어를 처리하는 것으로만 단정 지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외부 정보 입력, 내부 데이터베이스 검색, 대뇌피질의 데이터 처리 후 자율신경계를 거쳐 출력. 이러한 메커니즘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타인을 이해해 가는가? 외재론에 의한 마르스는 편향된 사람밖에 사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스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그의 메모리에 입력된 정보량에만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가 학습능력을 가진다고 해도 초기 프로그램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2016년 알파고의 딥러닝이 세상에 등장했지만, 오히려 이 딥러닝의 단점은 가장 완전한 것, 자신이 지지 않는 수만을 추구해 학습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때로 상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다. 알파고에게 패배하는 수를 학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의 긴 길에서 한 순간 패배해도 길게는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완전한 선택이 완전한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딥러닝의 가장 큰 함정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때로 전혀 엉뚱한 것에 이끌리기도 하고, 또 어느 날 사람이 갑자기 크게 변하기도 하며, 미쳐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환경과의 교감을 통해 날로 날로 새로워지기도 하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그러한 변화도 모두 기억의 네트워크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예수라든지, 부처 같은 인물의 뇌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까? 분명히 왠수는 왠수고, 마주치고 싶지 않고 미워해야 할 인물인데, 이 사람들은 왠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운 것을 가까이 보살피기도 하는 헌신적 존재인 것이다. ‘사랑하는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외재론적 관점에서 구문론의 범주로 환원된 후 자연언어로 연산처리가 될 수 있다고 해도, 희생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문제들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이다. 


우리가 인공지능 기계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은 심리적 투사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가 강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외재론의 마르스가 인간을 지키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자기 몸이 파괴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인간을 지켜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사랑이고 희생일까? 과연 그러한 행위의 순간에 마르스의 마음속에서는 사랑의 나무가 피어난 것일까. 심하게 말하면 외재론의 마르스는 어쩌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직도 인형과 친밀한 정을 느끼고, 가끔 마음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교감이지, 실질적인 나와 인형의 교감이 아닌 것처럼, 나와 외재론의 제트소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다. 



셋째 가름. 우리는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앞서서 외재론의 마르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근원적인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입장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외재론 말고 내재론적인 로봇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걸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인다. 또 한 발 더 나아가 과연 그러한 로봇을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신이 창조한 뭇 생명들을 두고, 즉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무수한 생명체들을 제쳐 두고 우리가 굳이 기계와 사랑을 나눌 까닭이 있느냐는 것이다. 기계는 그저 인간이 시키는 일만 척척하고, 말만 잘 들으면 됐지, 거기에 인간처럼 반항하고 외로워하고, 질투하고, 혹은 반란을 일으키고 한다면 그것만큼 귀찮고 '위험한' 것도 사실 없을 것이다. 


기계와 로봇에게 인간의 마음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어쩌면 외롭게 연구에 골몰해야 하는 쓸쓸한 과학자들의 고독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에 외로움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마음이 있는 로봇을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언젠가는 인류가 분명 마음을 가진 기계, 로봇, 컴퓨터를 생산해낼 시점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허나 그때 그들이 가질 마음이 분명 인간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인간의 마음에서 특수한 부분들을 제거한 형태의 프로그램화된 마음의 한 단면만을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뇌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모두 밝혀내는 날도 어쩌면 분명 도래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에는 과연 마음을 지닌 로봇이 탄생할까. 나는 거기에도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뇌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라도 가능하다면 인간은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출구를 얻게 될 테니까. 굳이 무리하여 마음을 지닌 로봇을 만들지 않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사실 잘 모르는 일이다. 외로움은 인간에게 너무도 근원적인 샘이니까. 영원히 마르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그런 샘이니까. 

* 고독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냈듯이, 고독한 누군가가 자신의 외로움을 온전히 채워주리라는 꿈을 품고 기계인간을 만들게 될지 모를 일이다.


영문학 최초의 SF로 꼽히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에 발표되었고,  여성 소설가 메리 셸리는 18세의 나이에 이 작품을 집필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제트소년 마르스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내 상상 속의 마르스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괴변이냐면, 우리의 제트소년이 비록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일에 봉사하고, 인간이 프로그래밍시켜둔 대로 행동하고, 애정을 베푸는 부분적인 마음의 기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급변하는 마음의 양상이라든지, 희로애락을 모두 갖춘 완벽한 마음을 지니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가능한 마르스는 ‘3인칭 기계의 마음’을 가진 마르스이고, 불가능한 마르스는 ‘1인칭 생명의 마음’을 가진 마르스라는 것이다. 


인간의 고독은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내가 존경하는 황순원 선생님께서는 소설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외롭게 마련야. 그래서 역사가 이뤄지구 사람을 죽이구 또 죽구 하는 게 아닐까. 본시 인간이, 그리구 땅과 하늘이 피를 요구하구 있다구 봐. 어떤 외롬에서 벗어나려구 말야. 그 피란 반드시 붉은 색의 유형의 것만을 말하는 건 아냐. 보이지 않는 가슴 속에 흐르는 피를 의미할 수두 있지.” 


-황순원 <일월> 중-


나는 비록 인간의 마음을 가진 기계는 가능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에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인지과학(오늘날의 뇌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말이다. 그날이 오면 진정 인간은 이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출구를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루라도 더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이 작은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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