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1950년, 바람 부는 흥남 부두를 떠올린다. 영하 20도 아래의 한 겨울이다. 육 킬로미터 밖, 열심히 행군을 해온다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중공군과 북한군이 밀려오고 있다. 수 만 명의 사람이 흥남 부두에 모여 어떤 배라도, 배의 형상만 갖추고 있으면 올라타려고 시도한다. 그것이 폭발하면 주위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연료를 실은 연료 수송선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훗날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30대의 미국인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전쟁터에 연료 수송을 하라는 첫 임무를 부여받고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교전 상황이 격화된 탓에 선장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선장이 배를 돌려 떠나려고 할 때 부두에 모인 수 만 명의 피난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장은 장고 끝에 결심했다. 그들을 배에 태우기로.
사다리조차 없었던 배에서 푸른 그물망이 아래로 던져졌다. 그것은 곧 피난민들에게 '높고 푸른 사다리'가 되었다. 1만 4천 명의 피난민이 올라 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일간의 항해 끝에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바다 도처에는 온갖 기뢰가 깔려 있었고, 공중에서 폭격을 받을 위험도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배에는 1만 4천 명을 먹일 식량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기적이 일어났다. 1만 4천 명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거제도항에 내렸다. 게다가 3일간의 항해 동안 배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기적이었다.
선장 레너드 P 라루는 본국으로 돌아가 뉴턴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수도원 수사가 되었다. 세례명은 마리너스. 그는 평생에 걸쳐 단 하나의 간절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제가 거제항에 내려준 그 1만 4천 5명의 한국인들이 무사히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혼자 멍하니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 없이 차갑고, 서글픈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아무도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아마도 그 느낌은 영원히 혼자 짊어지고 가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20대 청년이 되어서야 나는 어째서 내 마음속에 그런 우물이 생겨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나지 않기를 원했던 아기였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여러 조치들이 시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태어났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30년이 넘게 건강하게 살아오고 있다.
흥남부두에 선 피난민들에게 내려진 높고 푸른 사다리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그물망이었다면, 내게 내려진 사다리는 외증조할머니의 손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아직도 나는 내가 외증조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그 품이 주었던 따스함과 넉넉함이 나를 결국 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여곡절이 깊은 출생의 과정 때문인지 나는 유독 삶과 죽음의 문제에 고민이 많았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가, 어차피 죽을 텐데.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사람의 생이라는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찰나에 불과한데. 왜 태어나서 또 고통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가. 결국 되돌아와야 할 시간이 올뿐인데. 어린 나는 교회에 다녔고, 청소년 시절에는 불교와 인디언 서적을 탐독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기존의 것들과 함께 공자와 노자의 생각을 쫓아다녔다. 모두 흥미로운 탐구의 과정이었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내 근원적인 문제는 '외로움'이었다. 이상하게도 내 공부의 양이 더 쌓여 갈수록 나는 더욱더 외로워졌다. 더 말이 줄었고, 더 마음을 온전히 나눌 상대를 잃어갔다. 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내게서 평화와 자유를 빼앗아 가고는 했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공지영 소설가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그런 내게 내려온 작은 사다리다. 이 사다리를 타고 구원의 배 위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멀어진 구원의 사다리가 좀 더 보이는 쪽으로 올라설 수는 있게 되었다고 할까. 나의 외증조할머니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셨다. 어쩌면 저 바람 부는 흥남 부두에 외증조할머니가 서 계셨을지도 모른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내려온 푸른 그물망을 바라보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작은 삶 조차도 허투루 주어진 것이 아니구나 싶다. 숱한 시간과 고통과 희망들이 모여 만들어낸 기적. 어쩌면 모든 탄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훌륭한 사람도 되고 싶었고, 유명한 사람도 되고 싶었다. 그런데 생의 반 정도를 지나온 나는 별로 좋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유명한 사람도 못 되었다. 단지 다음 달 월세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조금 한심한 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저 멀리 있는 저 높고 푸른 사다리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을까. 작은 사다리 끝에 간신히 올라 나는 생각한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주인공 요한 수사는 사다리 끝에 다다랐다가 스스로 사다리를 내려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거대한 신의 계획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계획 속에서 요한 수사는 오히려 사다리의 마지막 구간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사다리의 마지막 구간이란 가장 극심한 고난이라고 한다. 인간은 절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소박한 속담을 여기에 가져다 놓아도 괜찮을까.
사다리를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내려오면서는 볼 수 있다. 요즘 나는 내가 혼자 이루어냈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많은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나 하나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하나 둘 깨닫는다. 어쩌면 이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잠시 멈춰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하나의 금언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가슴 깊이 깨닫기 위해 나는 오래 멈춰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조금 더 머물며 돌아보라는 섭리일까. 어느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은 내가 누구보다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섭리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서평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 내 넋두리를 늘어놓는 서평을 쓰고 말았다. 그러나 이 서평이야말로 <높고 푸른 사다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서평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 책이 놓아준 사다리 위에 올라 가까스로 생각한다. 내 삶의 무사함을 빌어준 것이 어디 마리너스 수사님 한 분 뿐이겠는가. 저물녘 강가에 반짝이는 빛 알갱이 수만큼 나를 위한 기도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떠올려 본다. 등이 곧게 펴진다. 좀 더 눈빛이 선해진다. 다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소설 속에서 예수의 목소리가 요한 수사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라. 더욱 사랑하라. 모든 보답 없는 것에 대해."
2015. 11. 8.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