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시콜콜

리라꽃 향기를 따라 리스본까지

어느 하루의 이야기

by 장명진

교정에 리라꽃이 만발해 있다. 아침에 등교하는 길에 흐린 바람이 운반해준 리라향을 잔뜩 맡았다. '리라'는 라일락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요즘 좋아하게 된 <나는 사슴이다>라는 만화책에서 본 이야기이다. 이 만화의 여주인공 이름은 리아이다. 리라와 리아. 모두 맑은 이름이다.


라일락은 작고 여려 보이는데도 그 향은 무척 짙고,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라일락은 그 작은 몸속에 그 많은 향기를 담아두기 위해 얼마나 오랜 밤을 보냈을까. 참 기특하고 어여쁘다.



나는 라일락을 퍽 좋아하지만, 라일락에 관해서는 별로 좋지 않은 추억이 되려 많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담배의 이름이 라일락이었던 것이다. 그 담배에서 나는 향과 라일락의 향은 천지 차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담배는 참으로 라일락을 모독하는 담배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어린 날에는 나는 그 담배에서 나는 향이 진짜 라일락 향이라고 착각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이선희 님의 '라일락이 질 때'를 들으면서도 고약한 담배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그 노래를 들으면 조금 더 아늑한 심상에 빠져들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라일락이라는 이름도 좋지만, 나는 리라라는 말이 더욱 좋다. <나는 사슴이다>의 리아처럼. 왜 그런가 하면 '리'라는 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설측음 'ㄹ'과 모음 'ㅣ' 가 합쳐진 글자 '리'를 사랑한다.


연은미 그림, 조은하 글의 <나는 사슴이다> 내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한국 순정만화계의 불후의 명작이다.


'리'라는 글자의 생김이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하게 보여 좋다. '리'라고 발음할 때 혀가 입천장에 살짝 미끄러지는 느낌도 좋다. '리'라는 소리도 좋다. '리' 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마치 잔 물결이 모래톱에 앉은 아이의 발가락을 적시는 것 같지 않을까.


'리'로 시작되는 말들 중에는 어여쁜 느낌이 드는 아이들이 퍽 많다. 리듬, 리본, 리코더, 리리시즘(서정주의), 리리스(아담의 첫 여친), 리기다소나무, 리스본, 리어(잉어) 등등.



'리' 자를 사랑하는 내가 어느 날 리기다소나무 아래서 누구를 기다리다 아득한 리라꽃 향기를 맡고 리리시즘에 빠져든다. 멀리서 예쁜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쓴 소녀가 걸어온다. 나는 그 소녀와 푸른빛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춘다. 그 소녀의 이름은 리리스이다. 리리스는 지도에 없는 나라에서 왔단다. 리리스가 리코더를 불면 노을이 진다. 붉어진 숲에서 우리는 언젠가 함께 리스본 항구에 많다는 리어를 보러 가자고 약속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가슴까지 스민 리라향은 사과처럼 익어가리라.


2006년의 4월 어느 날. 멀고느린구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 슈퍼소년 앤드류가 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