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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pr 25. 2016

짧은 만남, 긴 이별

어느 하루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외롭기 마련이고,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해줄 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김경호 씨의 노래 중에 좋아하는 곡이 있다. '긴 이별'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김경호 씨 본인이 만든 곡이고, 의외로 음역대가 낮아 비교적 부르기 쉬운 노래다. 노래의 멜로디 훌륭하지만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제목이다. 어쩐지 '긴 이별'이라는 말은 내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벌써 3주가 다 되어가는데 나는 얼마 전 사귀던 이와 이별을 했다. 4개월 남짓의 만남이었다. 2010년,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이와 이별한 뒤로부터는 가장 길었던 연애였다. 그 사이에도 짧은 만남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지속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나로서도 조금 진지하게 마음을 먹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4개월이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을 연장해가는 것은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나로서는 그리 매력적인 방식의 사귐이 아니다.


사람의 수명이 연장되어 평균 100세까지도 산다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 70년 정도 살다 가면 적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자면 나도 이미 내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셈이 된다.


나는 이성애자라서 그간 연애는 모두 여성들과 가져왔다. 운명이라고 느꼈던 여인도 있었고, 서로를 파멸로 치닫게 할 정도의 극단적인 연애를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이 사람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다. 한참이나 연하의 사람을 뜨겁게 만나본 일도 있고, 한참이나 연상의 사람에게 구애를 받아본 일도 있다. 서울과 부산 사이의 장거리 연애를 한 적도 있으며, 6개월에 고작 한 두 번 보는 연애를 해본 일도 있다. 하룻밤의 사랑도 해봤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무수한 연애의 종류 중에 해보지 않은 것이라고는 동성연애를 빼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해를 받은 일은 몇 번 있으니 이것도 해봤다고 한다면 해봤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이 글의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릴 영화 <노트북>


아무튼 내가 정한 적정 인생의 절반을 살아오며 이런저런 만남을 두루 가지다 보니 이제 연애라고 하는 사건에 그리 큰 기대를 품게 되지도 않고, 더 이상 내 인생에 더 엄청난 운명적 만남이 있을 거라는 욕심도 점차 사라져 간다. 외려 다시 또 그런 무지막지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조심스럽게 우회하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외롭기 마련이고,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해줄 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그 기대를 포기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영원한 외로움을 견디며 살 것을 다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몇 번인가 그런 다짐을 했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일을 반복해왔다. 이제는 그런 시도가 나처럼 마음의 뿌리가 없고, 허정허정 나부끼는 영혼에게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이 되지 않는 한 아마도 나는 끊임없이 외로워하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떠돌 것이다.


사람은 인생에서 대부분 수많은 짧은 만남을 하고 긴 이별을 맞이한다. 긴 만남을 가지는 것은 부부의 연을 맺는 사람이나, 죽마고우 등 손에 꼽을 만큼의 사람뿐이다. 어쩌면 그만큼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허락된 관계의 총량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소박한 인간에게는 관계의 총량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섯 손가락. 아마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을까.


수년을 만났던 사람이라고 해도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수 십 년의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역시 '짧은 만남, 긴 이별'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친구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지인들은 30년 뒤에 어느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안개 속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것으로 영영 끝이겠구나 싶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인생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와 아주 긴 시간을 함께 하기도 한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난다. 우리는 이 말이 진실이기를 소망한다.


지난 2010년의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주 긴 시간 소식도 모르고 지내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 기회를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여겼고,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원이라고 믿었던 것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반대의 일도 있었다. 순간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몇 주에 불과한 연애를 했고 서로 멀리 떨어지며 헤어져서 앞으로는 영영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을 그 사람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오역 투성이의 번역서와도 같다.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인생을 잘못 읽어내려가지만 결국 책장을 덮을 때는 그 책의 진정에 가닿게 되기도 한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의 카테고리에 들어갈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았다면 그래도 이제 '긴 만남'에 들어갈 이가 누구일지, 누구였을지 정도는 분간을 할 수 있어야 제대로 어른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자각해 가는 것 같다.


오래전 나는 사귀던 이가 너무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별을 말하기도 했고, 외모의 어떤 부분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거리를 두기도 했었다. 똑똑하지 못해서, 글을 잘 못 써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키가 커서, 키가 작아서, 전화를 너무 자주 해서, 전화를 너무 뜸하게 해서... 이런 그때그때의 사유들을 다 불러 모아서 늘어놓고 보면 나라는 놈은 대체 무얼 하고 살았던 인간인가 싶어진다.


내게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고 묻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묻지 않는다. 다만 정중한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멍하니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볼 뿐.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인생을 잘못 읽어내려가지만 결국 책장을 덮을 때는 그 책의 진정에 가닿게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요새는 그저 모든 게 인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고, 다하면 헤어지는 것일 뿐 그 안에 아무런 특별한 사유가 있을까. 되려 나는 내 스스로의 변심을 변명하기 위한 말들을 꾸며내며 살아왔던 것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없듯이,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는 그다지 없는 게 아닐까. 20대에는 희미하게만 보이던 서로를 이은 인연의 끈이 이제는 선연히 보이게 되었을 뿐. 당신과 내가 헤어지게 되는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누구의 탓이 있다면 아마도 분명 내 탓일 것이다.


연애는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나도 '긴 만남'의 카테고리에 누군가와 함께 들어가 남은 반생을 살고 싶다. 그러나 참으로 골치 아픈 것은 끈이 짧은 것은 선연히 보이는데, 긴 것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가 없는 것이 긴 인연인 것일까? 그건 아마도 지나간 당신인 것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인 것일까. 신은 어째서 우리들의 인생을 이리도 어렵게 번역해두었단 말인가. 타임머신이 있다면 70살의 내게로 가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만나보고 돌아오고 싶다. 그리고 돌아오는 즉시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앞으로 남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그 상대가 아직 내 고백을 받아들일 시기가 아닐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어떠하랴. 우리의 사랑이 끝내 더 길 텐데.


2014년 초여름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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