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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Sep 20. 2016

가르침의 때

인디언 교육 6


그분은 어떤 기술을 가르칠 때면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오로지 그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분은 우선 우리의 마음에서 알 필요를 이끌어내고 우리의 관심과 욕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비로소 그 필요을 채워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그러한 필사적인 마음을 맨 먼저 이끌어내는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우리가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또한 '코요테 선생'이었다. 코요테 선생은 학생에게 모든 대답과 기술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코요테 선생은 비록 실수할지라도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 톰브라운  <할아버지> 305 ~ 306쪽. 



교사로서 수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교사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3년 8개월가량의 군 복무 기간 동안 정훈장교로서 장병들에게 정신교육을 하던 때에도 이 기적은 단 세 차례 일어났을 뿐이다. (그 시절 난 수 백회에 이르는 강연을 했었다.) 그중 내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강연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여름 신병교육을 했던 일이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고 동시에 당시 정부의 4대 강 사업을 홍보하는 내용의 강연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강연장에 모인 신병은 약 1,000여 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해 있는 신병들을 대상으로 1시간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당시로서는 아마도 '소녀시대'가 유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해내고 말았다. 


강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엄청난 적의와 저항감을 느꼈다. 저 놈은 뭐냐. 여자 정훈장교님을 기대했건만. 뭐야 계급도 별로 안 높은 놈이 우릴 감히 교육해. 아, 뭐야 또 따분한 정신교육이냐. 1,000여 명이 내지르는 마음의 비명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첫마디를 내뱉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좋아하시는 분 여기 있습니까? 너무너무 사랑하고 그리워서 못 견디시는 분? 네, 없네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3대 세습을 한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시는 분? 네, 역시 없네요. 그럼 이것으로 오늘의 정신교육을 마치겠습니다."

"우와아아!!!" 



난 태어나서 그렇게 우렁찬 함성은 들어본 적이 없다. 20대 청년들이 복식호흡(?)으로 내지르는 그 함성을 들으니, 내가 제대로 준비한 강연을 했다면 테러가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정신교육을 단기속성 과정으로 끝내고 내가 시작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는 신병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기였다.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군대의 삶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한 나라에 살고 있는 동시대인으로서 앞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시대적 과제들, 그리고 그것을 돌파해나갈 수 있는, 혹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받아들이면서 서핑할 수 있는 지혜들에 대해. 신병들이 내 이야기에 빨려 드는 그 속도에 나마저 감격했을 정도로 강연은 재미있게 진행됐고, 강연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방금 막 파바로티가 인생 최후의 공연을 끝낸 것과 같은 정도의 박수를 받았다. 


이런 무용담을 구태여 끄집어낸 까닭은 결국 첫머리에 소개한 위대한 할아버지의 말을 부연하기 위해서였다. 더 나아가 말하면 독자들이 나의 글을 읽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내려온 분이라면 이제 그 준비를 마친 것일 테다. 


국가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보통교육, 즉 '공교육'을 시작한 역사는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교육이란 것은 원래 '사적인'것이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 본래 교육의 기원이다. 그러니 요즘에 와서는 '공교육'의 적으로 여기고 있는 '사교육'이 사실은 교육의 선배인 셈이다. 학교보다 과외의 역사가 더 오래된 것이다. 


운보 김기창 <서당>. '서당'은 대표적 사설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학원'은 사실 꽤 역사적 유래가 깊은 것이다.


학교와 과외의 가장 큰 차이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이 글의 제목으로 내 건 '가르침의 때'를 들 수 있겠다. 무슨 말이냐면 학교의 교육은 '가르침의 때'를 모르지만, 과외는 '가르침의 때'를 안다는 것이다. 공교육은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전체를 통째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려고 한다. 아이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배울 때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봄이 되면 봄의 교과서를 배우고, 가을이 오면 가을의 교과서를 배울 뿐이다. 아이가 만약 모르고 지나쳤다면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지 교육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과외는 아이가 알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공교육은 반의 한 아이가 덧셈, 뺄셈을 못해도 곱셈, 나눗셈으로 넘어가버리지만, 과외는 아이가 덧셈, 뺄셈을 모른다면 곱셈, 나눗셈으로 절대 넘어갈 수 없다. 애초에 덧셈, 뺄셈을 모르는 아이가 곱셈, 나눗셈에만 흥미를 보일 리도 만무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공교육보다 사교육의 인기가 높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르침의 때'를 교육 스스로가 정해버리는 교육은 사실상 그 정형화된 때와 어긋난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교육이 아닌 것이다. 


'공교육'을 시작한 역사는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교육이란 것은 원래 '사적인'것이었다.


내 윗 세대가 종종 미담사례로 들곤 하는 훌륭한 학교 교사상의 예시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자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라도 잠을 깨운 뒤, 한 자라도 더 배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교사들은 애들이 자든 말든 남의 일이니 관심이... 운운하는 이야기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랍다.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아이에게 교사의 강의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마법은 어떻게 부릴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저주의 주문이나 듣고 있지 않으면 다행이 아닐까 싶은데, 참 놀랍다. 


나로 말하자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도 아이고 의미 없고, 그렇다고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하는 거지비 하고 방관하는 것도 조금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명, 가르침에는 때가 있다. 가르치고자 하는 스승의 마음과,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마음이 딱 들어맞는 순간, 교육은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가장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에서 모든 아이에게 그 순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는 상황을 반복해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핀란드 같은 경우는 이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상황 별로 여러 보충수업에 대한 선택권과 아이들의 수용 정도에 따른 다양한 레벨의 수업을 배치하도록 공교육에서 제도화하고 있다. 


열매는 저마다 열릴 때가 되어야 열린다. 한 겨울에 씨를 뿌리고 사과가 봄에 열리기를 기다리는 과수원 주인에게 우리는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그런 제도는 교육감과 교육부의 영역으로 두고 일단 논외로 둔다면, 그다음은 교육자의 마음가짐 문제다. 


만약, 몽둥이를 드는 교사라면(물론, 체벌은 금지되었지만 그를 대체하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고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일) 스스로의 방법이 지닌 효율성을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듣고 싶지 않은 말에 눈을 감았던 아이가 어떤 강압에 의해 눈을 뜬 뒤,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을 다시 듣고 싶게 될 것인가. 아니면, 그 강압의 요소 때문에 가뜩이나 싫었던 것이 더 싫어질까.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는 굳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방관하는 교사라면 차라리 아이의 잠재된 학습욕구까지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좀 더 낫겠다 싶다. 그러나 아이는 아마 점점 그를 스승으로 존경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고, 교사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교사인지 모호해지고 말 것이다. 


이 양쪽에 선 교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톰브라운의 스승이었던 아파치족 원주민 할아버지 '뒤를밟는늑대'의 조언이 아닐까 싶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몽둥이도, 무념무상의 경지도 아니다. '유혹의 기술'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다.


'유혹의 기술'이란,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굉장히 매력적인 무엇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것이 너의 인생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완전히 믿게 만드는 최면술법도 있고, 이것만 알게 되면 멋진 여자/남자가 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사기법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교사의 프라이드다. 자신이 강의하고자 하는 어떤 지식, 지혜에 있어서 스스로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 스스로가 그 분야의 전문가여야 하며, 그 지식을 삶의 여러 요소에 응용하여 펼쳐 보일 수 있어야만 아이들은 비로소 눈을 빛낸다. 교사 스스로가 "아, 이 과목은 수능 볼 때 중요한 거니까, 졸지 말고 잘 들어!"라고 자신의 가르침을 규정하고 있다면 이미 유혹은 실패다. (물론, 여기에 진심으로 낚이는 아이들도 분명 있지만.)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라는 것은, 아이가 지금 당장 내가 가르치는 것을 흡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아이는 자기만의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혹시 언젠가 아이가 자기를 찾아와 그때 배우지 못했던 것을 다시 배우고 싶다고 청할 때 마음을 열고 다시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을 인내를 뜻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너이녀석내수업안듣고수능점수잘받나어디두고보자'라는 주술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이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는 낙관을 내려주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사람과 사람 간의 영성을 믿고 있는 나는 그런 작은 마음가짐의 차이라도, 훗날 아주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고 생각한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몽둥이도, 무념무상의 경지도 아니다. '유혹의 기술'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모쪼록 오늘날 한국의 공교육을 보고 배울 것이 아니라, 자국 원주민의 교육문화를 살려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국에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철학 수업을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절반의 아이가 깨어 있고, 어느 날은 한 두 명의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 있기도 하며, 어느 날은 한 두 명의 아이만 깨어 있기도 하다. 나는 매 시간 그 깨어 있는 아이에 맞춰서 최선의 강의를 한다. 혹, 지난 시간에 깨어 있지 못했던 아이가 다음 시간이 되어 전 시간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물어올 때면, 먼저 시간에 깨어 있었던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시 지난 강의를 요약해서 말해주곤 한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뒤늦게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 보충수업을 개설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 수업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글쓰기를 재미있는 일로 여기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나는 절대로 억지로 글쓰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쓰고 싶다고 강하게 의욕을 내는 학생에게는 별도로 혹독한 하드 트레이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어느 날은 쓰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쓰고 싶지 않을 때는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림이나 음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고 싶지 않을 때는 그리지 않아야 하며,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는 노래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영역의 배움이 아니라, 표현하는 영역의 배움은 결국 그 감성의 결을 성장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강요와 억압은 그 감성의 결을 크게 해친다고 본다. 


내가 수업을 하면서 가장 큰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어떤 학문을 좋아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싫어하게 만들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하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한 번 들은 배움은 어떤 배움이든 중립적인 형태로 아이의 마음속에 머문다. 그러면 훗날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질 때면, 편안하게 그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교사는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길러내는 것은 각자 아이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이 싫어하는 것은 강요다. 어떤 배움이 강요의 형태로 다가올 때, 아이들은 그 배움을 거부하게 된다. 혹은 왜곡된 형태로 마음의 상처와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그에 비해 유혹은 자연의 한 과정이다. 꽃은 향기와 빛으로 나비를 유혹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다만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발길을 이끈다. 


2014. 12. 13. 멀고느린구름.




아파치족(Apache) | 


북아메리카 남서부의 인디언. 19세기 후반 코치즈, 망가스 콜로라다스, 헤로니모, 빅토리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아래 이 지역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이들의 영토는 지금의 미국 애리조나 주 중동부와 동남부, 뉴멕시코 주 남서부와 동부, 텍사스 주 서부, 멕시코의 치와와 주 북부와 소노라 주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 분포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파치족의 언어가 캐나다에서 쓰이는 아타바스카어와 약간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바호족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선조도 멀리 북쪽 지역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이들이 남서부 지역에 이른 것은 1000년 이후였을 것이다. 이미 15세기 이전에 일부가 남서부 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졌으나, 1700년에 와서야 플레인스아파치족 농민들이 캔자스 주 디즈멀 강 주변에 살게 되었다. 말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들과 플레인스아파치족은 남쪽과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코만치족과 유트족에게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문화적으로 아파치족은 메스칼레로족· 지카릴라족· 치리카후아족· 리판족·카이오와아파치족 등을 포함한 동(東)아파치족과 키베쿠에족·밈브레뇨족·코요테로족·모고욘아파치족을 포함한 서(西)아파치족으로 나누어진다. 카이오와아파치족(→ 카이오와족)을 제외한 모든 동아파치족과 서아파치족은 중앙집권적인 부족 조직이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정한 지역 안에 형성된 자치적인 소집단들이 일차적인 정치단위이자 전쟁과 약탈의 기본적인 단위였다. 지역 집단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비공식적인 추장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한 지도자 밑에 여러 소집단이 결합되기도 했다. 따라서 추장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생계의 일부를 사냥과 식용식물 채집에, 일부는 농사에, 나머지는 약탈에 의존했다.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는 부족마다 크게 달랐다. 지카릴라아파치는 옥수수와 야채 등을 재배하며 상당히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으나, 평원 인디언들처럼 들소 사냥에 의존하기도 했다. 원래 지카릴라아파치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텍사스의 리판족은 대부분 농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들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메스칼레로족은 평원 인디언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주요식량은 메스칼(용설란)이었다(메스칼레로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음). 치리카후아족은 리오그란데 강 서쪽의 아파치족 중에 가장 이동이 잦고 호전적인 부족이었던 것 같으며, 드래곤 산맥에 있는 요새에서 멕시코 북부, 애리조나, 뉴멕시코까지 약탈을 하러 갔다. 서아파치족은 여러 유마 인디언들과 함께 자주 약탈을 했으나, 동아파치족보다 정착해서 살 때가 많았고, 농사에 많이 의존했다.


아파치 전쟁은 미개척지에서 일어난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아파치족은 스페인인, 멕시코인, 후에는 미국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7세기초 스페인 선교사들을 기습하곤 했으며,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푸에블로 인디언)을 부분적으로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 1858년 어패치 고개에서 백인들과 치리카후아아파치족 사이에 열린 회담으로 1861년 추장인 코치즈가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평화가 유지되었다. 코치즈가 일으킨 전쟁은 미국 연방군과 남서부 인디언 사이에 25년 동안 계속된 아파치 전쟁과 나바호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아파치족과 나바호족은 날랜 말을 능숙하게 다를 줄 알고 지형에도 익숙했지만 미국 연방군의 우수한 무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바호족은 1865년 항복한 뒤 뉴멕시코 보호구역에 정착하기로 동의한 반면에, 아파치족은 1871~73년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전사들 대부분이 영구적인 유폐생활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따라서 제로니모와 빅토리오가 이끄는 기습전이 주기적으로 계속됨으로써 또다시 연방정부의 개입을 불러왔다. 아파치 전쟁은 결국 1886년 제로니모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치리카후아족은 서부지역에서 이동되어 플로리다·앨라배마·오클라호마의 실 요새 등에서 전부 27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1913년 오클라호마에서 할당지를 받거나 뉴멕시코의 메스칼레로 보호구역에서 살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1/3은 할당지를 받았고 2/3는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20세기말 아파치족의 인구는 모두 1만 1,000명으로 조사되었다. 서아파치족은 애리조나 중동부의 포트어패치·샌카를로스 보호구역에서 산다. 오클라호마 어패치 부근에 사는 부족민을 제외한 치리카후아족·메스칼레로족·리판족은 뉴멕시코 남부에 있는 메스칼레로 보호구역에 살며, 지카릴라아파치는 뉴멕시코 동북부에 있는 보호구역에서 산다.


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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