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no. 24
나, 보노보노를 만났어.
캐롤 송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올 무렵이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원체 엉뚱한 이야기를 잘 꺼내던 그녀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듣는다. 그 비버 말이지? 내가 되묻는다. 비버가 아니라, 해달이잖아. 그녀의 왼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랬었나? 그랬었나가 아니잖아, 그런 거야, 애초부터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거잖아. 그녀에게 그런 기묘한 이유로 일일이 화를 내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그래, 만나서 뭘 했는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묻는다. 지금, 뭘 했느냐가 중요해? 그녀는 오늘 밤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지도 모른다. 뭘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노보노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야, 알겠어? 어째서 당신은 이런 걸 언제나 일일이 알려줘야 이해하는 거야? 그렇게 아직도 날 모르겠어? 세상에! 보노보노 라구, 내가 지금 보노보노를 만났다고 말한 거라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있는다. 커피를 한 모금 더 삼키고 싶지만 온 힘을 기울여 참는다. 시나브로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노보노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일전에 얘기했었지? 트위터에서 보노보노라는 닉네임 계정을 팔로잉했다구. 팔로워는 얼마 안 되는 계정이었는데, 43명이었나? 그쯤. 그런데 뭐랄까 그 계정은 묘한 매력이 있어서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 중에서도 눈여겨 보게 되는 그런 게 있었어. 하루 에 한 개, 아니면 두 개 정도의 글을 올렸는데… 그게 뭐랄까 정말, 그러니까 진짜 보노보노가 지구 어딘가에서 그런 글을 써서 올리는 것 같았어. 그래 우스운 얘기란 거 다 알아. 걔는 물론 국적은 일본이겠지만, 뭐 오키나와 섬에 살고 있다고 치자. 거기 사는 해달이 조개를 한 손에 쥐고 휴대폰 대리점… 참, 일본에도 그런 게 있나? 암튼, 휴대폰 대리점에 가서 자기의 이름을 보노보노라고 쓰고 오키나와 섬 근처의 어디 바위 위를 집주소로 쓴 다음 월정액 서비스를 선택한 후 스마트폰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아, 꼭 스마트폰일 필요는 없지. 우리는 왜 벌써 이렇게 당연하게 사람들이 트위터를 컴퓨터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하고 있다고 단정 지어 버리는 걸까? 아, 보노보노는 ‘사람들’에 포함되지는 않는구나. 하지만 분명 바위 위나 바닷물 위에 떠서 트윗을 날리려면 스마트폰이 아니면 불편할 거야. 일본에서는 아무래도 아이폰이 인기니까… 최신 기종을 산 걸까. 그러면 아이폰 5S? 어머, 나랑 똑같은 걸 쓰는 거겠네.
자, 중요한 건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제부터 본론이니까 잘 들어봐. 당신은 본론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본론인 줄도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주는 거야.
보노보노는 자기에게 멘션을 보내오는 사람들에게 100% 답을 해주는 매우 친절한 사람, 아니 해달이었어. 누군가 “외롭지 않나요?” 라고 물어오면 “오늘은 숲에 가서 포로리가 도토리를 줍는 걸 도와줬어요”라고 대답하는 식이야. 정말 귀엽지? 그래서 나도 가끔씩 보노보노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그랬었어. 이전에는 뭐였더라… 아, 맞아! “취업하기 너무 힘드네요 ㅠ ㅠ”라고 멘션을 보냈는데, 보노보노가 그렇게 답을 했지 아마. “하루 종일 바다에 떠 있는 일은 더 힘들어요. 하지만 괜찮죠. 하루 종일 바다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 멋진 대답 아냐? 그치? 어떻게 생각해? 그래, 멋졌어.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해서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는 4개월이나 교류라면 교류를 해와서 어느 정도 이제는 서로 친구라고 해도 좋겠다 여길 즈음이었는데. 트위터로 쪽지가 온 거야. “만나실래요?” 이 의문형의 한 문장만 써 있던 쪽지. 물론, 망설였지. 인터넷에 이상한 종자들이 한 둘이어야지. 나도 보노보노랑 4개월이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친구라는 감정이 무르익기도 하고 그랬지만… 세상이 하도 흉흉하니까… 혹시, 만났는데 단순한 변태라든가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히키코모리라든지 보노보노에 심취한 오덕후 같은 인물이면 나는 이 세상을 더는 인정할 수 없게 돼버릴 것 같았거든. 내가 인정하고 말고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며칠을 고민하다가 나 결심했다. 만나는 쪽으로 말야. 미안해, 당신한테 얘기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지금 당신 표정을 거울로 봐야해. 듣고 있지만 듣고 있지는 않는 것 같은 그런 눈빛 말이야.
잠깐, 지금 진짜 듣고 있는 거야? 내 얘기? 어휴,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조금 더 진심이 되어봐, 당신. 휴… 그래, 듣고 있는 거라고 믿을게. 정말, 내 믿음을 배신하지는 마. 알았지? 그래서 지난 주에 만났어. 당신도 만나자고 그랬었지 그날 점심에. 미안. 그때 만난다고 했던 친구가 보노보노였어. 하지만 생각해봐 그때 내가 당신한테 전후 사정없이 보노보노를 만나기로 해서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했다면 당신은 이번 일주일 내내 기분이 꽝이었을 거야. 배려였다구. 좀 마음을 넓게 가져봐. 바닷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체 왜 그래?
보노보노를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딘 줄 알아?. 웃지마. 홍대 앞이야. 세상에 웃기지 않아. 보노보노를 홍대 앞에서 만나다니. 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특활부서 선배를 만나기로 한 여자애처럼 두근거리며 그를 기다렸어. 보노보노는 약속한 정시에 도착했어. 나는 그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놀랍게도 진짜 보노보노였어. 그래,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만화 영화의 보노보노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고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야. 근데 뭐랄까 그… 내 눈앞에 있던 그건 분명 보노보노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생명체였어.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으니까, 보노보노가 친절한 말투로 말하더라. 세상에 별일 다 있죠. 난 풋하고 웃음이 터져버렸어. 정말, 세상에 별일이 다 있지 않아? 이상한 세상이야. 우리는 세상을 너무 몰라. 누구나 어른이 되면 아는 척은 하고 살지. 하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세상을 아는 사람은 없지 않니? 당신도 생각해봐 한 번. 당신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려고 하는지 말야.
보노보노와 나는 하염없이 보도블럭 위를 따라 걸었어. 합정까지 걸어가서는 한강에까지 갔다니까. 정신없이 대화를 나눴어.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얘길한 것 같아. 보노보노는 정말 바다에 살고 있대.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물결의 무늬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어서 놀랍다고 했어. 바람의 냄새도 시시각각 변하고, 하늘의 구름들이 지어내는 모양들은 사람의 상상력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다양하대.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없지? 물론, 나도 없지. 여고생 때는 조금 해봤으려나…. 그런 게 우리한테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치만 보노보노에게는 그것이 세상인 거야. 자기가 자기의 눈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알아간 거라구. 아, 이건 내 표현이 아니라 그애 표현이야.
우리는 한강 산책을 마치고 다시 합정역을 지나 홍대 앞 쪽으로 걸었어. 해가 지기 시작했고, 그는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얘기했어. 나는 너무 아쉬워서 저녁이라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미안, 그날 저녁 당신이랑 약속이었잖아. 하지만 당신은 여기 있잖아. 근데 보노보노는 꼭 그날이 마지막인 것만 같았거든. 뭐라고 해야 돼? 머나먼 은하계에서 단 한 번 지구를 방문하고 가는 외계인 같은 느낌이랄까. 그날의 보노보노에게선 그런 비장미가 느껴졌단 말야. 그래, 그날 난 당신을 만나서 ‘봉골레’를 맛있게 먹었지. 보노보노가 거절했단 뜻이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는데, 그 미소가 어찌나 단단한지 바로 포기를 해버렸어. 보노보노가 뒤돌아서 노을이 진 비탈길을 따라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아, 정말 보노보노구나 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야.
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어딘가 묘하게 진심이 느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음미한다. 좋은 경험이었네, 나도 그 사람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트위터에서 그냥 보노보노로 검색해보면 그 계정이 나오나? 프로필 사진이 뭐야? 역시 보노보노겠지? 나는 참았던 커피 한 모금을 비로소 삼킨다. 온화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묻는다. 그녀가 대답한다.
보노보노 계정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하아… 이것 봐, 당신은 영영 날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녀와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였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