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히야마 하쿠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나는 나그네가 되어 오래전 보았던 풍경의 기억을 되살리고, 앞으로 내가 보게 될 풍경을 상상한다. 나의 열차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나를 실어다주는 마법의 빗자루 같은 것이다. 다른 어딘가, 그곳은 아마도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꿈속의 이상향일 것이다."
나는 '고히야마 하쿠'라는 작가를 모른다. 그가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에 올라 있는 작가인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 그 작품이 매력적인지 아닌지 모른다. 다만 그가 1937년에 훗카이도 다키노우에서 태어나 1976년 <데바>라는 소설로 데뷔하여 일본 문학계에 일정한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라는 것만을 알고 있다. - 이 또한 책 날개에 친절하게 써있는 것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꺼내 읽게 된 것은 책 제목이 주는 아련한 느낌 탓이었다.
작년 봄, 동네에 있는 조그만 책방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낡은 책들을 꺼내어 먼지를 닦고 장르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한참 동안 먼지를 들이키며 작업을 하다 한 숨 쉬는 도중 우연히 이 책에 눈이 가게 되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니. 지나치게 상투적인 제목이잖아. 라며 나는 책을 꺼냈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그 일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결국 책 정리가 끝나는 날까지 반복되었다. 묘한 마술에 걸린 것처럼 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꺼냈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행동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제목을 비웃으며 다시 돌려놓았지만, 다음 날에는 작가의 프로필을 살펴보며 '음 쓸만한가' 라고 여기게 되었고, 그 다음 날에는 페이지를 넘겨 몇 개의 문장을 읽어내려갔으며, 그 다음에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다 읽었다. 책 정리가 끝난 마지막 날에는 책방의 주인에게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선물받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묘한 마술에 걸린 것처럼 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꺼냈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행동을 반복했다.
제목도 표지도 특별할 것 없이 담담한 이 책은 그 내용마저 담담하기 그지 없어 구태여 이런 책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가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담담함이 이 책의 미묘한 매력이다. 작은 내용을 부풀려 선전하거나 자극적인 문장과 화려한 표지로 자신을 선전하기 여념이 없는 오늘날의 책들. 그 가운데서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 나면 몇 줄이라도 읽어보게. 뭐 바쁘면 어쩔 수 없고 말이야. 당신에게 대단한 것을 알려줄 그런 책은 아니니까.'
그런 매력에 이끌려 나는 이 책을 읽어내려갔다. 일본의 노작가 고히야마 선생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몇 가지 소박한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가며 다음과 같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훗카이도의 농촌에서 태어난 고히야마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자라나고, 형제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속깊은 사장의 도움으로 훗카이도 신문사의 인쇄공으로 취직하게 된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책을 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소설쓰기 모임 등에서 활동하다 39세의 나이에 사카모토 카즈키(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버지)씨의 도움으로 첫 소설 <데바>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고히야마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도와준 사람들을 소중하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어 소박한 문체로 그 고마움에 대하여 써내려간다. 마치 영화가 끝난 후 잔잔한 음악과 함께 스탭롤이 소개되는 것마냥.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면 스탭롤따위는 보지 않고 영화관을 나와버린다. 하지만 고히야마 선생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만든 것은 감독과 배우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을 만드는 것도 우리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잠깐 스쳐지나간 사람마저 우리의 '인생'을 조용히 지탱해주고 있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니 가만히 앉아 한 번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아 주십시오. 라고.
나는 잠시 막을 내리고 지난 내 인생의 스탭들을 떠올려 본다. 스물한 살 즈음 혼자 전국 일주를 할 때 통영에서 친절하게 싼 민박집을 알려주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주머니까지. 아홉 살 무렵 내게 자기의 가장 큰 딱지를 선물해주었던 이웃집 친구의 얼굴까지.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이었고, 이름도 모를 수백만 사람들의 자비 때문"이라는 고히야마 선생의 소박한 깨달음이 진심으로 다가온다.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잠깐 스쳐지나간 사람마저 우리의 '인생'을 조용히 지탱해주고 있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잊지 말아주십시오.
앞으로 나는 더 많은 인생을 여행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것, 결국 내 힘으로 모든 걸 해내는 거야 라는 오만한 생각이 들 때면 다시 이 책을 꺼내어 한 줄 한 줄 정성스레 고히야마 선생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 가야겠다. 잊지 말아야겠다.
"한 사람의 노력조차 남의 힘에 의해 생겨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2011. 1. 1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