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한눈팔기>
1904년의 나쓰메도 21세기를 살고, 21세기의 우리도 1904년을 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린 1904년의 삶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3년의 삶(이 글을 쓴 시점)과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작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약 10년이다. 시기로는 1905년에서 1916년 사이다. 1916년 12월 9일에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자전적 소설 <한눈팔기>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약 1904년. 그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막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한눈팔기>에는 격변의 시기를 한 발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근대 지식인이 작가로서 변모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양가에 양자로 입양되었다가 다시 친가로 복귀한 한 유년의 상처를 지닌 겐조. 양부모와 친부모 양쪽으로부터 모두 외면 당한 셈이다. 어느 쪽으로 뿌리를 내릴 없었던 아이는 자라서 모든 인간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어른이 된다. 그런 그가 붙들고 있는 것은 오직 지식인으로서 소양을 쌓았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변화된 세상, 근대는 더 이상 선비로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게 되었다. 훌륭한 지식인이 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존경어린 눈빛이 아니라, 대출 상담일 뿐이다. 누구도 그가 진정 구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 심지어 그 자신조차 - , 단지 그가 가진 지식이 부의 축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만 판단한다. 정작 겐조 자신은 경제 실리에 전혀 밝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다.
이런 근대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의 연장선 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밀도의 압축성장을 통해 경제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고, 독재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확고한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 대한민국이다.
허나 우리는 과연 근대를 벗어난 걸까. 근대를 지배한 담론의 본질은 '끝없는 발전'일 것이다. 끝없는 개발과 무끝없는 자본의 증식.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이 서양에 의해 적극적으로 발명되면서, 인류는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래, 시간, 발전은 모두 근대의 발명품이다. 근대 이전의 삶은 '순환' 속에 있었고, 가장 중대한 것은 지켜내는 일이었다. 국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는 일,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순환하는 삶 속에서 인류는 제한적인 공동체 속에서 구성원들끼리 오랜 세월에 걸쳐 합의된 단순한 것들을 익히고, 지켜가면 그만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순환의 패러다임은 근대의 등장과 함께 깨졌고, 세계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후진국이라는 3단계 구조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바로 이미 발전한 국가, 발전하고 있는 국가, 이제 발전하려고 하는 국가라는 구성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마저도 경제의 '발전'만은 양보하지 않는다. 21세기의 화두마저도 '지속 가능한 발전'이니,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들이 여전히 근대 이상의 패러다임을 발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쓰메 소세키의 <한눈팔기>는 무척 현재적 이야기로 읽힌다.
겐조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아내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들과의 관계의 문제. 그리고 서로가 채권자와 채무자로 얽히게 만드는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 주인공 겐조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문제도, 자본주의의 모순도 적극적으로 해결해내지 못한다. 그 양자 사이에서 번민하며 그가 선택하는 것은 '한눈팔기'다. 나쓰메 소세키의 분신과 같은 겐조에게 한눈팔기는 '소설 쓰기'였다.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집필이라는 샛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허나, 나쓰메 소세키가 선택한 '한눈팔기'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가장 훌륭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직시'로 남게 되었다. 그가 한눈팔기를 통해 기록한 '근대의 시작'과 '마음의 문제'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원시적인 인류 생산의 기능에 마음을 다하면서도, 근대적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삶의 싹도 조금 품고 있는 겐조의 아내는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가 바라본 1904년 일본의 근대적 소시민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전근대적 세계에 갇혀 있는 겐조에게 아내는 서투른 충고를 하며 근대의 시작을 알리지만, 겐조가 보기에 근대적 삶이란 모든 인간이 돈에 의해 평가되고, 돈에 의해 본성을 잃고, 모든 관계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대체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도도한 변화의 흐름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겐조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바쁜 걸음이었다. 모두 일정한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263쪽
겐조는 문득 뭔가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열흘간 글을 쓴다.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불쾌함을 자각하면서도 그는 자기 몸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맹렬히 일했다. 마치 자기 육체에 반항이라도 하듯, 그리고 몸을 학대하기라도 하듯, 또한 자기 병에 복수라도 하듯. 그는 피에 굶주렸다. 그러나 남을 살육할 수가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자신의 피를 빨면서 만족했다."
- 273쪽
1904년의 나쓰메 소세키는 달라진 세계의 부정적인 모습 앞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변모 앞에 무력한 자신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이후 10년간 그가 불세출의 걸작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생명 자체를 글로 바꾸어내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눈팔기>를 읽으며 여러 정황들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1904년 일본의 근대 지식인이 고민했던 문제를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내가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일견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인류가 지난 100년간 공을 들여온 것은 이 세계에 화려한 포장지를 덧씌우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자본주의적 삶이라는 것은 그 겉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 본다 한들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한계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내는 것이 옳은가. 나 역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러니 이렇게 서평이나 쓰며 '한눈팔기'나 하고 마는 것이다.
2013. 12. 8. 멀고느린구름
*2017년 시점에서 제목과 본문 등 약간 개정을 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