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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ul 26. 2017

풀베개 / 고독했던 글렌 굴드는 <풀베개>를 사랑하고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고독했던 글렌 굴드는 <풀베게>를 사랑하고 


초여름, 나는 글렌 굴드의 음악에 한참 심취했다. 소리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흐려지려는 내 정신을 선명하게 깨워주었다. 글렌 굴드는 마치 지금 이 순간 연주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연주하는 듯했다. 1981년 그는 그렇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남기고 1982년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고독하고 예민했던 글렌 굴드의 유품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가 발견됐다. 1967년, 글렌 굴드가 연주 활동을 그만둔 지 3년째 되던 해에 윌리엄 폴리 교수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었다. 글렌 굴드는 이 책을 무척 아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차례 되풀이해 읽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낭독을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글렌 굴드는 어째서 <풀베개>를 그토록 사랑했을까. 


젊은 날의 글렌 굴드


현암사에서 나온 전집이 참으로 아름다워 구매해두고는 읽지 않고 있던 <풀베개>를 서가에서 꺼내 읽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초부터였다. 정권 교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개인의 삶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가오는 무더위처럼 더욱 더 숨이 막히기만 할 즈음이었다. 더 큰 절망이 있을 때 개인의 절망은 사사로워질 수 있으나, 세계가 희망으로 가득 찰 때 개인의 절망은 더욱 절망스러워지는 법이다. 


<풀베개>의 주인공인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서양화가 '나'는 새로이 시작된 문명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일본제국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脱亜入欧 사상에 입각해 유럽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륙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할 즈음이다. 일본제국 사회는 일본제국이 이미 아시아를 초월했으며, 서구 열강의 한 축으로 부상하리라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주인공인 '나' 또한 그러한 풍조에 걸맞게 '서양화공'이라는 직함을 지니고,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끝없이 동경한다.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


하지만 유별나게도 '나'는 일본의 선배 화가들이 지켜온 동양화의 정신을 지키고 싶어한다. 이른바 비인정非人情의 세계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발하는 희로애락의 정감을 초월하여 그저 거대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두는 동양의 세계관을 서양화풍에 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 - 우리나라에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표현했다 - 에 입각한 생각이다. 이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에 바탕을 둔 것이니 풀베개의 주인공 '나'는 사실 결코 일본제국의 일원으로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나'를 유별나다고 평한 것은 그가 양재洋才(서양의 기술)보다 화혼和魂(동양의 정신)에 훨씬 기울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풀베개> 내내 그는 자신의 양재를 그다지 뽐내지 않는다. 반면 끝없이 서술되는 그의 관념 속에는 사라져가는 화혼에 대한 '연민'만이 가득하다. '나'는 작중에서 은근히 연모하고 있는 여관집의 아가씨 '나미 씨'를 그려보고자 하지만 그녀에게 이상의 그림 - 동양판 <오필리아> - 을 완성할 요소인 '연민'이 표정에 나타나지 않아 애닳아 한다. 인정人情을 초월한 비인정非人情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나는 어째서 '연민'이라는 정情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시대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다


한중일, 동아시아의 세 나라는 공자의 탄생이래 줄곧 유교의 정신 아래에 있었다. 유교의 정신을 모아 강물에 던진 후 가장 중요한 한 글자만 떠오르게 해본다면 반드시 다음의 한 글자가 떠오를 것이다. 인仁. 사람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면 그 사이에는 반드시 인이 있어야 한다. '나'가 추구한 연민이란 곧 공자의 인仁과 같은 것이리라. 동양화에서 그려내는 비인정의 세계란 사사로운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난다는 의미이지, 인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비인정의 상태가 될 때에만 사심私心을 내려놓고, 세상과 삶의 순간을 조화롭게 보고 인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곧 공자가 가르친 중용中庸의 태도인 것이다.


<풀베개>의 주인공은 문명화되는 세속이 싫어서 옛 자취가 남은 산골로 들어 갔지만, 오히려 그곳에 머물렀기에 미래에 다가올 일본제국의 파국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세우는 국가,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고 순응해가는 사람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들에게서 비로소 '연민'의 정이 나타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이 희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바로 그들 자신이 연민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어느 초여름날, 겸재 정선은 소나기가 퍼붓고 간 아침의 인왕산을 화폭에 담았다. 인왕산 자락에서 함께 어울려 자랐던 죽마고우 사천 이병연의 병환을 듣고서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담은 진경산수화이지만, 제색霽色, 곧 '비가 개는 것'처럼 벗의 병환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벗은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지만, 비인정의 세계 속에 '연민'이 가득한 이 그림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어느 가을이었던가,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있다. 어디선가 겸재 선생이 나를 다독이는 듯했다. 무척 고독했던 때였다. 


고독했던 글렌 굴드는 <풀베개>를 사랑하고, 고독했던 나는 <인왕제색도王霽色圖>를 사랑하였다. 나는 글렌 굴드의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시작했다. 덕분에 오늘은 서로를 연민한 글렌 굴드와 나쓰메 소세키, 겸재와 내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인왕산 기슭의 정자에 모여 가만히 물안개를 바라보는 네 사람을 눈을 감고 그려본다. 그래, 모쪼록 우리들의 비가 개었으면 좋겠다.


2017. 7. 2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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