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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an 17. 2018

리틀 시카고 / 우리가 꿈에 대해 물을 것은

정한아 <리틀 시카고>


우리가 꿈에 대해 물을 것은


정한아 소설가의 첫 장편 <달의 바다>를 읽은 것이 벌써 2008년의 일이다. 나는 그 책을 두 번 읽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읽고 싶어서 다시 읽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달의 바다>를 읽고 소설가 정한아에게서 요시모토 바나나스러움을 발견하고 기뻤다. 바나나스러움이란 <리틀시카고> 후면에 쓰인 김윤식 평론가의 추천사처럼 '청량감'이기도 하고, 내가 사용하는 '긴 손가락을 가진 피아니스트'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긴 손가락을 지닌 피아니스트는 어려운 음악도 쉽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데뷔 장편 <달의 바다>에는 분명 그런 청량감과 단순함이 미덕으로 살아 있었다. <리틀시카고>에도 그 미덕이 여전히 감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작만큼 살아 있다는 느낌은 없다. 적어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먼저 이렇게 흠집을 내는 말부터 꺼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좋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을 '좋았다'고 평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순전히 마지막 세 페이지 '에필로그' 부분 덕분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중간에 글 읽기를 포기하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 마지막 세 페이지를 위해서 책장을 넘길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겨두고 싶다. 


"꿈에 대해 물을 건 하나뿐이란다." 잭슨 할아버지는 미카의 가슴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것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가.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하는가."


- 정한아 <리틀시카고>. 107P


'리틀시카고'는 경기도 동두천의 미군 부대가 있던 지역의 별칭이다. 이 소설은 미군들과 함께 살아가던 리틀시카고 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 마음에 가장 선명한 자국을 남긴 것은 위에 인용한 구절이었다. 아마도 여러분 또한 미군 주둔지역을 떠올릴 때 다음과 같은 단어를 함께 떠올렸을 것이다. 전쟁, 범죄, 마약, 성매매, 유흥가, 폭행, 더러움 등등. 이는 언론이 이 지역을 보도한 방식의 영향이기도 하고,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들이 스스로 만든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의 장소를 무대로 한국의 중년 남성 소설가가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아마도 몹시 퇴폐적이거나, 몹시 숭고한(?) 두 종류의 작품 중 하나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마치 많은 한국 남성들이 여성을 떠올릴 때, 성녀 아니면 마녀인 식으로 생각하는 습관과 맞닿아 있다. 이런 이야기라면 굳이 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무렵의 동두천 거리


정한아 소설가는 여성이다. 이 소설가는 엉뚱하게도 '아이'의 이야기를 한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 있는 애매한 나이의 여자아이 이야기를. 이 아이에게는 아직 사춘기조차 오지 않은 것 같다. 정한아 소설가가 <리틀시카고>의 주인공으로 어린 아이를 내세운 것은 아마도 내가 인용한 구절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떠도는 이미지와 선입견으로만 떠올렸을 리틀시카고에도 꿈이 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고, 새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희망의 싹이 있다. 소설 <리틀시카고>는 담백한 어조로 이 메시지를 꾹꾹 눌러 써나간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많다. 문장에 너무 새로움이랄까, 자기다운 표현이 없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아이의 시점이 많이 혼란스럽다. 책 광고 문구에는 주인공 선희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에 비견하고 있지만 그 정도의 매력은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건의 빠른 전개에 더 신경을 쓴 탓인지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아픔이 충분히 공감되지 못한 채 스쳐가버리는 경향이 많았다. 그 탓에 마지막 세 페이지의 감동이 반감된다. 내 가슴에는 충분히 리틀시카고 사람들의 마음이 쌓이지 못했다. 물론, 이 부분은 내 몫이 절반일 것이다. 어떤 이는 또 <리틀시카고>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세계의 묘미는 또 그런 것에 있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가 떠도는 이미지와 선입견으로만 떠올렸을 리틀시카고에도 꿈이 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고, 새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희망의 싹이 있다. 


고통과 슬픔은 리틀시카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남에도 있고, 뉴옥의 중심가에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가 결국 '리틀시카고'다. 그러니 리틀시카고를 우리가 특별히 볼 필요가 있을까. 그곳에 전쟁에 지친 미군이 살았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성을 매매해야 했던 여성들이 살았든. 우리 역시 저마다의 싸움에 지쳐 있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매매한다. 어떻게 저것과 이것을 똑같이 취급하느냐고 소리를 지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리틀시카고>를 권하고 싶다. 담담하게 읽어보시라고. 


세상을 적시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가 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가.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하는가."


소설 <리틀시카고>에서 주인공 선희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인생을 아주 조금 살아보니 기적은 굉장히 작위적이다. 말도 안 되는 순간에 꿈은 이루어지곤 했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꿈을 꿔보자고, 꿈을 잃지 말자고 주문처럼 중얼거려 본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종종 아프기 때문에, 나는 종종 내 꿈을 다시 떠올린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 우리가 꿈에 대해 물을 것은 정말 하나뿐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한국 리틀시카고에서의 꿈이든, 미국 뉴욕에서의 꿈이든 말이다. 


2016. 5.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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