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내일 그대와>
인기 없는 드라마를 묵묵히 시청해나간다는 것은 무척 고독한 일이다. 게다가 그 드라마가 애국가보다 못한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나는 언젠가 진실한 여행서를 집필하기 위해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 도무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동묘지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내일 그대와>는 그날의 일을 내게 상기시키려는 양 나날이 시청률이 떨어졌다. 이러다가는 드라마의 마지막 즈음에 공동묘지 신이 등장할지도 몰라! 라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1500원짜리와 2000원짜리 두루마리 휴지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5분 이상을 소비하다 끝내 1500원을 선택하고 마는 하잘것없는 인간인 나라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분연히 남영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나마 쓸모 있는 것이라고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 내게 남영역에 가는 것만은 가볍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일이었다. 남영역 버스 정류장에서 남영역 1호선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10분 정도였다. 봄이나, 가을, 혹은 여름이라도 대응이 가능한 차림으로 - 반팔 티셔츠 위에 가볍고 얇은 수트를 입었다. - 1호선을 기다렸다. 곧, 1호선이 플랫폼을 여유롭게 미끄러져 들어왔고, 평일 2시경의 남영역에는 벤치의 그림자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내일 그대와>를 회생해보려는 목적으로 1호선 지하철에 올랐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혹 씨씨티비가 있었을 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남영역에서 1호선을 타고 2030년의 서울에 도착한 나는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미래로 와버려서는 어떻게 해도 애국가 시청률에 패하고 만 드라마를 회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의 멍청함을 자책하며 남영역을 나와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복권 번호라도 알아볼까 싶었다. 하지만 곧 2030년의 복권 번호 따위를 알아내봤자 내가 2017년의 현재로 돌아가 13년 동안 그 번호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다. 그냥 2030년의 내가 무얼하고 있는지나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체 13년 후의 내가 어디에 살고 있을지를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웹사이트 같은 것을 검색하여 혹시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었나 찾아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아닐 경우, 혹여 어디에서도 이름을 발견할 수 없을 경우, 나는 어쩌면 현재로 돌아가 구인구직 광고를 검색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2030년으로 오는 것이 이렇게 아무 짝에 쓸모 없는 일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남영역에 가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게 드라마 <내일 그대와>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꼬일 대로 꼬여서 2030년의 인류에게 <내일 그대와>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검색해보고 2030년의 공기 속에 조소라도 봉헌하고 가야지 싶었다. 버스를 타고 서울 시청역에서 내려 시청 민원실에서 무료 웹 검색대를 이용했다. 그리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그대와>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명작 드라마로 칭송을 받고 있었고, 동호회 회원 수만 해도 200만 명. 게다가 헐리우드에서는 레이첼 맥아덤스를 주연으로 영화로 리메이크가 된 상태였다. 나는 대체 우주가 나에게 왜 이러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몹시 기분이 나빠져서 시청 건물을 빠져나와 광장의 잔디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2030년의 5월이었고, 하늘은 대책없이 파랗고 눈부셨다. 공기는 어쩐지 2017년보다 훨씬 깨끗했다. 문득, 그냥 이대로 미래에서 살아버리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도 직업도 소속도 없는 인간이 문명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에 와보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싶었다. 바로, 2017년의 내가 말이다. 지나간 것은 대개 아름답게 만들어버리니 인간이란 참 구제불능이지 싶었다.
사실, 내 마음 속에는 <내일 그대와>처럼 나도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간사한 인간은 과거를 미화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서 간신히 살아간다. 나는 단지 한줌의 간사함을 손에 쥐고 다시 2017년 현재로 향하는 남영역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붉은 노을이 플랫폼을 물들이고 있었고, 가까스로 퇴근을 성취한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계를 탈출하고 있었다. 나는 탈출할 데도 없으면서 공연히 그 퇴근 인파 속에 끼여 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내리기 시작한 2017년의 저녁 속으로.
2017. 5. 2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