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이토 <산의 톰씨>
서른 살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귀농을 하려 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확인한 것은 내게는 귀농할 자금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사랑의 능력도 그다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를 갖추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훌쩍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귀농은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카모메 식당>을 열었던 코바야시 사토미는 <산의 톰씨>에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사치에’에서 ‘하나’로 개명한 코바야시 사토미는 고즈넉한 일본의 산간 마을에서 중학교 졸업생인 남자 조카 ‘아키라’와 관계를 알 수 없는 젊은 여성 ‘토키’, 그리고 토키의 딸 ‘시오리’와 함께 공동 산촌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이 함께 기거하는 일본의 전통 목조 주택은 “아, 이런 곳이라면 나도 한 번쯤”이라고 읊조리기 충분한 곳이다. 벽과 기둥, 마루 등지에서 나뭇결이 드러내는 담백한 시간의 무늬는 사람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예술 작품이다. 사방으로 비춰드는 햇살은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며, 집과 자연을 한 덩이로 만든다.
그래서일까?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남성들은 무해하다. 아이들을 위해 능숙하게 요리를 하거나, 넌지시 병든 고양이를 진료해주고 떠나며, 어린 염소를 돌본다.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남성성이라곤 고작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수컷인 고양이 ‘톰’마저 이러지러 돌아다니며 귀여움을 퍼뜨릴 뿐이다. <산의 톰씨>는 영화의 세계 속에서 지극히 의도적으로 가부장적 남성성을 배제한다. 주인공인 두 여성에게는 남성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고,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저 여성인 그대로 온전하게 삶을 영위한다.
영화 속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활기차다. 자신이 가야할 곳과 있어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문구점의 할머니는 어쩌면 이들 여성이 도착하는 삶의 한 모델인지도 모르겠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낚시를 취미로 즐기며 씩씩하게 혼자 산길을 걸어가는 할머니. 어린 소년에게 인생의 의미를 부드럽게 흘려주는 할머니. 시종일관 쏟아지는 햇살과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무의 머리칼이 이 온정적 세계를 완성한다.
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단다. 많은 일들이 있겠지... 무척 기대 되는구나.
염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 씨앗을 먹어버리는 것이 일생일대의 사건인 세계. 바로, 활기찬 여성과 무해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다. 1907년에 태어나 2008년에 일생을 마감한 여성 동화작가 이시이 모모코는 <곰돌이 푸>를 일본에 소개한 작가이자, <산의 톰씨>의 원작자다. <산의 톰씨>는 1957년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이 유토피아는 몹시 오래된 유토피아인 셈이다. 요즈음 미투 운동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이 유토피아와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우리는 언제쯤 저 멀고 오래된 유토피아에 도착할 수 있을까.
긴 툇마루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서로 뒤섞여 앉아 빵을 나눠먹는 장면이 무척 아름답게 영화의 끄트머리를 장식한다. 감독 ‘우에다 오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보라, 미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 감독의 다음 목소리도 꼭 들어보고 싶다.
2018. 3. 5. 멀고느린구름.
* 이 리뷰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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