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성 <코리아>
이 영화는 영 별로다. 지금부터 친구와 까페에 마주 앉아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면 아이스 커피 세 잔은 충분히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배두나, 하지원, 한예리, 천우희, 이종석 등 당대의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 정도로 밖에 찍을 수 없었던 감독은 그 피치 못할 사연을 반드시 대국민 담화의 형태로 발표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에는 이 영화가 거둔 성적(18만여명 관객)이 너무 초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겸비한 훌륭한 영화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시시각각 우리 앞에 당도하는 이 시대에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탓이다. 하나는 한국영화사 속에서 여성 중심 영화의 맥을 기억하기 위해서고, 둘은 영화 <코리아>가 건네려고 했던 메시지가 오늘날에야 우리 마음을 진정 흔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근대사상 혁명의 한 축이었던 페미니즘은 그 모든 핍박을 견뎌내고, 21세기에도 우리 앞에 ‘미투 운동’의 물결과 함께 살아 있다. 많은 여성 영화인들은 남성 중심으로 움직여 왔던 기존의 한국영화계를 성토하며, 여성 중심 영화의 성장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이들은 기존 한국영화에 여성 중심 영화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다양한 여성 중심 영화의 출현을 소망하는 일이 기존 영화의 존재를 지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실패하고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어도 여성 중심의, 혹은 여성의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코리아>는 심지어 여성 중심의, 여성 서사를 다루는, 거의 온전한(감독이 남성이라는 것만 제외하자면) 여성 중심 영화다. 1991년 4월 결성되어 불과 한 달간의 합숙 훈련 후, 세계 챔피언인 중국을 쓰러뜨렸던 여성 탁구 남북단일팀의 실화를 다룬 이 이야기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어도 자연스러웠을 콘텐츠다. 남측의 은메달리스트 현정화(하지원 분)와 북측의 희망 리분희(배두나 분), 그리고 세계 무대에 첫 데뷔하여 챔피언을 꺾어버린 북측 선수 유순복(한예리 분), 이 세 여성의 이야기는 유튜브에 올라 있는 4-5분 분량의 다큐멘티러만 보더라도 눈물을 쏟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이 세 여성의 우정과 그 우정의 매개가 되어준 스포츠인 ‘탁구’ 그 자체에 집중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카메라는 자꾸 엉뚱한 인물들을 비추고, 가공의 사건들로 인위적인 긴장을 만들며, 중심이 되어야 할 탁구를 영화적 도구로 활용하는데 그치고 만다.
<코리아>는 여성 중심의, 여성 서사를 다루는,
거의 온전한 여성 중심 영화다.
그런데 어째서 였을까. 영화의 끝에 예정된 이별을 보며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하지원도 배두나도 현정화와 리분희에게 제대로 이입하지 못했다고 영화 내내 꽁알거렸음에도, 두 사람이 버스의 얇은 창 하나를 두고 눈물을 흘리며 남과 북으로 헤어질 때 나는 함께 울었다.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탁구팀의 감독이 된 현정화 선수는 49세고, 북측의 장애인체육협회 서기장을 맡게 된 리분희 선수는 50세다. 두 사람이 함께 팀이었던 때에는 각각 스물두 살, 스물세 살이었다. 27년이 흘렀다. 두 사람은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의 상대방으로 한 차례 만난 것을 끝으로 지금까지 25년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현정화 선수는 그 25년 동안 수차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꾸준히 말한다. 리분희 선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리분희 선수 역시 드문 외신과의 인터뷰 때마다 잊지 않고 전한다. 현정화 선수가 그립습니다.
영화는 짧고 인생은 길었다. 2018년 1월 현정화 선수는 평창패럴림픽에 리분희 선수가 북측 장애인체육협회를 대표하여 방남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에는 꼭 만나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북측 대표로 다른 이가 내려오게 된 것이다. 현정화 선수는 리분희 선수를 만나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한다. 리분희 선수는 현정화 선수가 25년 동안 마음으로 준비한 그 식사를 언제쯤 맛볼 수 있을까.
영화 <코리아>의 클라이막스 장면, 배두나와 하지원은 다음의 대사를 주고 받는다.
남북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서로의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봄처럼 환하게 웃으리라고 누가 미리 알았을까. 거기까지 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4월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5월이다. 완연한 봄은 지금부터다. 영화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되고 있다.
2018. 5. 1. 멀고느린구름.
* 이 리뷰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새로운 리뷰는 매주 화요일마다 HAGO Journal 란에 선공개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