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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21. 2018

당신의 길잡이 늑대를 따라가라

인디언 교육 8

크리(Cree)족의 마을 풍경


내 말에 '독수리처럼 일어서'가 갑자기 천둥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희한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웃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리 인디언들에게는 '길잡이 늑대'라는 것이 있소. 그는 고대로부터 우리 인디언 전사들이 숲에서 사냥을 할 때 우리를 안내해 주는 안내자인 것이오. 우리 할아버지 '새벽같이 잠깨어'는 위대한 주술사였는데, 어느날 사냥에 나섰다가 다른 주술사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게 되었소... (중략) 그때 푸르렀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 한 조각이 밀려오면서 사람 하나가 구름 위에서 소리쳤소. 그 방울을 절대 땅바닥에 놓지 말고 공중에 든 채로 태워 버리라고. 그가 바로 '길잡이 늑대'였소. 그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새벽같이 잠깨어'는 힘을 잃고 아마도 그 자리서 목숨까지 잃었을 것이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길잡이 늑대'가 있나요?"


라싸가 또다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녀는 꽤나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으려면 당신은 이 네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하오. 정직성, 성실성, 선량함, 그리고 남을 보살피는 너그러운 마음이오."


- 류시화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107~108P 중



내가 이 책을 읽은 때는 내 나이 열여섯 살 즈음이었다. '길잡이 늑대'라는 개념은 내게 무척 참신한 것인 한편 절실한 것이었다. 가정과 학교, 어디에서도 나는 안정감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의 길을 이끌어줄 수 있는 어떤 앞선 존재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선배가 되었든, 선생님이 되었든, 혹은 아이돌 연예인이 되었든 상관 없었다. 온전히 믿고 따르며 전범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다. 


길잡이 늑대는 류시화 시인의 소개에 따르면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영혼의 안내자로,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혹은 번민의 순간이면 나타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주는 정령이라고 한다. 나는 이 길잡이 늑대를 처음 마음에 새겼던 열 여섯 살 무렵부터 십 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 길잡이 늑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여 왔다. 그 과정 속에서 몇몇 의문을 품기도 했다. 류시화 시인의 수필집이 계기가 되어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의 명사서적이나 연구 서적들을 탐독했지만 이 '길잡이 늑대'를 서술하고 있는 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길잡이 늑대'의 개념은 류시화 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혹시, 이에 대한 자료가 있으신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학생 시절 내게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줬던 책


허나 '길잡이 늑대'가 온전한 창작인 것은 아니다. 유사한 개념을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글에서 찾을 수 있고, 또 류시화 시인이 만났다는 '독수리처럼 일어서'라는 캐나다 마니토바 출신의 원주민에게서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마니토바 출신의 원주민이라면 '크리(Cree)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크리족은 내면의 성찰을 중시하는 심오한 종교관을 가진 부족이다. 한편, 크리족의 이야기를 다룬 책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에서 소개되는 체로키족(대평원 부족들과 크리족은 서로 문화적 교집합을 지녔던 듯하다)의 유명한 이야기도 '길잡이 늑대'의 흔적을 보여준다. 



어느 날 저녁, 체로키족 노인이 손자에게 내면의 감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얘야, 우리 안에 있는 두 마리 늑대가 싸움을 벌이고 있단다. 

그 중 한 마리는 못 된 늑대지, 그것은 분노, 질투, 후회, 탐욕, 거만, 무시, 죄의식, 원한, 열등감, 거짓말, 불명예, 우월감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란다. 기쁨, 평화, 사랑, 희망, 경건, 겸손, 친절, 공감, 너그러움, 진실, 동정, 믿음이지. "


손자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네가 먹이를 더 많이 주는 늑대가 이기지." 


위베르 망시옹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108~109P



길잡이 늑대를 우리에게 친숙한 불교적 개념으로 쉽게 말하자면 내 속에 있는 '참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여러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주 간단한 갈등 속에서도 말이다. 바로 어제 나는 마스다 미리라는 일본 만화가의 새로 나온 책을 살 것이냐 말 것이냐로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정도의 내면의 말을 들었다. 


1번 뭘 고민하냐 사라. 

2번 네 경제적 상황을 먼저 생각해라 사지 마라. 

3번 지금 살지 말지를 확정하지 말고 좀 더 시간을 둬봐라 그게 정말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내 경우를 돌이켜보면 항상 욕망의 말은 간단하고, 그 욕망을 억누르는 말은 간단히 욕망의 말을 뒤집은 말이었으며, 현명한 판단은 말이 좀 길었다. 나는 어제 3번을 선택했다. 3번의 말을 길잡이 늑대의 말, 참 나의 말로 생각한 셈이다.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교육은 결국
아이들이 내면 속에 저마다 올바른 길잡이 늑대를 기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참 나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며,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우리는 '열반'에 이르고 번민으로부터 해방되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설법한다. 내 견해는 조금 다르다. 나는 참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참 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참 나가 단련되고 완성되어 간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궁극적으로 '무아론(無我論 : 자아 - 고정불변의 본래적인 나 - 는 없다)'이 되는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길잡이 늑대는 누구의 내면에나 깃들어 있지만, 누구나 길잡이 늑대의 목소리를 분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수리처럼 일어서'의 말대로 정직성, 성실함, 선량함, 자비심을 이미 갖춘 사람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지만 사실상 만들어지는 무엇인 셈이다. 공자의 유학도 마찬가지의 말을 한다. 인(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인(仁)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배움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하는 일, 유학에서 인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는 일, 아메리카 원주민이 '길잡이 늑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일은 모두 유사한 어떤 행동의 다른 표현이다. 그 행동은 아주 단순하지만 어려운 행동이다. 그 행동은 바로 매 순간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냐면 바로 체로키족의 노인이 말했던 선택이다. 일화를 다시 인용해본다. 


크리족의 추장 '파운드메이커(버팔로 우리를 짓는 사람)'


"얘야, 우리 안에 있는 두 마리 늑대가 싸움을 벌이고 있단다. 

그 중 한 마리는 못 된 늑대지, 그것은 분노, 질투, 후회, 탐욕, 거만, 무시, 죄의식, 원한, 열등감, 거짓말, 불명예, 우월감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란다. 기쁨, 평화, 사랑, 희망, 경건, 겸손, 친절, 공감, 너그러움, 진실, 동정, 믿음이지. "


손자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네가 먹이를 더 많이 주는 늑대가 이기지." 



우리의 길잡이 늑대는 저 먼 은하계에서 날아온 늑대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먹이를 더 많이 준 늑대이다. 우리의 삶이 길잡이 늑대의 안내에 따라 방향지어진다고 하면, 어떤 길잡이 늑대를 내면에 기를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교육은 결국 아이들이 내면 속에 저마다 올바른 길잡이 늑대를 기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저마다의 다양한 방향성을 갖되, 아이들 각자를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들어 줄 길로 안내할 수 있는 길잡이 늑대 한 마리씩을 마음에 뿌리내리게 해줄 수 있다면 가장 멋진 교육자라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마음에 바른 길잡이 늑대를 분양해줄 수 있을까. 물론, 간단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에서 올바른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은 탐욕, 분노, 질투, 열등감, 무지 등등의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으면서 아이들에게는 다른 늑대에게 먹이를 주라고 해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먼저, 당신의 길잡이 늑대를 길들여야 한다. 당신의 삶을 정말 이롭게 해줄, 풍요로운 자유와 평화로 가득 차게 해줄 늑대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종종 오해한다. 거대한 사건만이 세상과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당장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라.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스다 미리의 새 만화책을 사느냐 마느냐 결정하는 일이다. 결국,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이 나를 바꾸고, 세상도 변화시킬 나비의 날개짓이 된다. 당신의 진정한 길잡이 늑대를 찾으시라. 그리고 당신의 길잡이 늑대를 따라가라. 아이들은 뒤따를 것이다. 


2015. 6. 11. 멀고느린구름.



*원문 = 교육웹진 우물을 나온 개구리




크리족(Cree族) |


예전에는 허드슨 만과 제임스 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앨버타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의 아주 좁은 중심지역에 국한해 살았으나 유럽인들로부터 총기를 얻고 모피교역을 시작한 이후인 17~18세기에 영토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러나 다코타족·블랙풋족과의 교전, 1784, 1838년에 천연두의 전염이 확산되면서 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오늘날에는 단지 몇 개 집단만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캐나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인구는 총 7만 명 정도로 대부분 덫을 놓거나 사냥을 해서 먹고 산다. 


크리족은 접촉해오던 다른 부족으로부터 다양한 생활양식을 받아들인 결과 2개의 주요분파로 나누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윔피크리족 또는 마스케곤족이라고 불리던 우들랜드크리족으로, 땅이 척박해서 옥수수를 재배할 수 없어 대부분 사냥에 의존했지만 문화는 본질적으로 동부 삼림지대 문화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플레인스크리족인데 이들은 북부 그레이트플레인스에서 살았으며, 들소를 사냥했다.



우들랜드크리족은 순록·사슴·곰·비버 사냥을 선호했지만 사냥감이 귀해 주로 산토끼를 잡고 여러 가지 들새를 사냥했다. 그러나 토끼가 귀해져 기아로 고생하게 되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풍습(유럽인들뿐 아니라 부족민들의 이야기에도 전해짐)이 생겼다. 전쟁기간에는 많은 집단들이 동맹을 맺었지만 사회조직은 친족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기반을 두었다. 마법에 대한 공포, 사냥동물의 정령들과 관련된 다양한 금기나 풍속을 중시했으며, 샤먼과 마법사들이 상당한 권세를 누렸다. 플레인스크리족은 말과 총기를 얻고 나서 우들랜드크리족보다 더욱 호전적이 되어 다른 평원 부족들을 습격하고 싸움을 벌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플레인스크리족은 12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졌으며, 각 집단은 추장이 다스렸지만 통합된 군사 모임이 따로 있었다. 종교와 의식은 전쟁과 들소 사냥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매우 중시했다. 전통적으로 플레인스크리족과 우들랜드크리족 모두 어시니보인족과 동맹관계에 있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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