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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ug 31. 2018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돌리지 말게

인디언 교육 9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돌리지 말게



"백인에게는 딱 두 종류의 인디언만이 존재하네. 술 취한 건달과 현명한 인디언이지. 옛날에 우리는 야만인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런 사람은 다 사라지고 없네. 이제는 술꾼과 현명한 인디언뿐일세. 나는 백인이 우리를 술꾼으로 여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최소한 우리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니 말일세. 자기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눈에 보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그러다 술꾼이 아닌 인디언을 만나면 그들은 어떻게든 그 상황을 처리해야만 하네. 모든 인디언을 현자로만 보는 사람은 인디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네. 단지 인디언의 생각에만 관심이 있지. 그건 우리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고 인디언을 백인의 필요에만 부응하는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일세. 


인디언처럼 되는 방법을 알고 싶나? 대지와 가깝게 생활하게. 몇 가지 소유물을 없애버리고 서로 도우며 살게. 조물주에게 말을 건네고 가능하면 더 조용히 살아야 하네. 땅 위에 쉴 새 없이 무언가를 건설하는 대신 땅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세.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누군가를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려 하지 말게. 됐네.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네."


- 캔트 너번 <상처난 무릎, 운디드니> 중, 댄 노인의 말. 228p



인디언이 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인디언 관련 서적을 읽어갔던 시기가 있다.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던 인디언 음악 씨디를 이태원의 골목에서 어렵게 찾아내 듣고, 히피처럼 옷을 입고, 상아 목걸이를 걸고, 잠자리에는 드림캐처를 항상 걸어 놓았던 시절이다. 나는 정말 '내가 아닌' 인디언이 되고 싶었다. 1960년대 전후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도 사실 '미국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었던 미국인들의 움직임이었다. 히피 문화를 체험했던 저자 캔트 너번은 '진짜 인디언'을 찾아서 오지브와족 인디언 노인을 만나지만 그가 애타게 구하던 '진짜 인디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단지 그가 상상한, 그의 '마음이 만들어낸 인디언'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진짜 한국인'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짜 인디언'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찾아헤매는 모든 '진짜'라는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것들 중에서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 것'을 제외한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짜'는 '가짜에 대한 믿음'들이 모여 만들어낸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자신이 '거짓'이라고 확신하는 것들을 소위 합리적 사고를 통해 하나씩 제외해 감으로써 '참'을 도출해낸다. 그 방식은 어떤 절대적인 '참'을 맹목적으로 신봉해버리는 것보다는 근사해보이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타진요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난 적이 있다. 왓비컴즈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가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카페를 개설해 힙합 뮤지션인 타블로가 명문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고, 방송에서 보여진 많은 모습들이 거짓이라고 수 년에 걸쳐 주장했고, 이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마치 정말로 타블로가 심각한 사기꾼인 것처럼 몰리게 되었던 사건이다. 법원의 판결과, 여러 르포 프로그램에 의해 왓비컴즈의 주장이야말로 한낱 개인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손쉽게 드러났다. 타블로는 너무도 명백하게 명문대학교를 졸업했고, 방송에서 했던 말들도 모두 진실에 기반한 것이었음이 공개적으로 밝혀졌다는 말이다. 사건은 그렇게 종결 되었을까? 


인디언스런(?) 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진짜 인디언이 아닐까?


'진짜 한국인'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짜 인디언'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은 아니다. '타진요 사건'은 아직도 미결이다. 왜냐하면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왓비컴즈가 여전히 타블로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그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사건은 영원히 미결인 채로 남을 것이다. 왓비컴즈는 타블로의 행동들에서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되는 것들을 하나 하나 수집했고, 그것들을 엮어서 가상의 타블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왓비컴즈의 진짜 타블로'는 현실의 타블로와 별개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마치, '진짜 인디언', '진짜 한국인', '진짜 하느님', '진짜 진리' 등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그런데 먼저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우리는 왜 '진짜'를 찾고 싶어 하는가?

무언가가 '가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가?

바로 '나'다. 


내가 강렬하게 인디언이 되고 싶었던 때는 20대 초중반 무렵이었다. 그때 왜 나는 인디언이 되고 싶었을까. 그 당시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인디언의 가치관을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물론, 그와 같은 바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가난했고, 어리석었다. 초라하고, 무력했다. 빛과 그림자의 영역이 있다면 그림자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던 내가 좀 더 근사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서 찾아낸 것이 바로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단지 인디언 흉내만 내면 그만이었다. 그 흉내를 내는 데는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인디언에 대해 알고 있고, 내가 그들을 점점 닮아가고 있다고 상상하면 됐다. 그렇게 나는 손쉽게 내가 아닌 인디언이 되어 갔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노래와 춤을 즐기는 것으로 '히피'는 될 수 있겠지만...


그 방식을 통해 나는 몇몇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에 성공할 수록 나 또한 스스로에게 현혹되어 갔다. 20대 후반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마치 내가 위대한 인디언 성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 모든 환상이 '다행히' 산산조각 난 것은 군대 체험을 통해서였다. 뒷짐을 지고 짐짓 현자인 척 할 수 있었던 사회에서, 모든 것들이 암묵적 '폭력과 압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회로 무대를 옮겼을 때 나는 그야말로 알몸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인디언인 채 할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지고서야 내가 스무 살 이후로 사실은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인디언이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나를 나 자신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적어도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 한다. 그렇기게 굳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모아놓고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해봤자 아이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에 지금이 아닌 무엇이 되려고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말하는 일은 단지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언지 밝히는 일에 불과하다. 스크류바가 좋아, 죠스 바가 좋아 하고 물을 때, 스크류바요 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하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사람을 '지속적인 평화'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시킨다. 왓비컴즈가 자신이 만든 '진짜 타블로'를 영원히 만날 수 없듯이, 우리도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마치 아주 가벼운 깃털과 같다. 손을 뻗어서 잡으려고 하면 그 손짓이 일으킨 손바람에 의해 깃털은 아주 조금 뒤로 밀려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주 가벼운 깃털은 영영 잡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이 '아주 가벼운 깃털 쫓기'를 멈출 수 있을까. '진짜 나', '진짜 인디언'이란 것은 없어! 라고 결심하면 되는 것일까. 해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이런 식이 되기 때문이다. 


진짜 인디언은 없지만, 진짜 부처님은 있지. 

진짜 부처님은 없었지만, 진짜 하느님은 있어. 

진짜 하느님은 찾지 못했지만, 진짜 알라는 내 곁에 있어. 

진짜 알라는...


어쩌면 좋을까. 이것은 그냥 사람의 운명일까. 그냥 진짜를 찾기 위한 여행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게 사람의 인생인 것일까. 벗어날 수 없는 수레바퀴 속을 알면서도 걸어가야 할까?


내가 그저 나인 것이 까닭없이 좋았던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하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심리학에서는 '투사(投射)'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스스로 납득할 수 없거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방어 기제.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른다.


표준국어사전은 위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토끼와 곰이 사이좋게 딸기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다. 나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토끼와 곰, 그리고 나는 서로 친구 사이였다. 나는 토끼와 곰이 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맛있는 걸 먹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토끼와 곰은 그냥 내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고 굳이 부르지 않은 것이다. 고작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라고 부르는 게 더 실례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배려를 반대로 '따돌림'이라고 해석한다. 내 불안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투사한 마음은 오해를 풀어도 사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즉, 토끼와 곰으로부터 그건 따돌림이 아니라 배려였어! 라는 말을 듣더라도 "끄응..." 하는 마음의 찌꺼기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것이다. 이 찌꺼기들이 모이면 의심이 되고, 의심은 '진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눈 앞의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하게 된 사람은 세상을 진짜로 바꾸려고 하고, 

내가 진짜가 아니라고 믿게 된 사람은 나를 진짜로 만들려고 한다. 


아, 참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침묵이다. 가라 앉히는 일이다. 정신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른 잡념의 부유물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차분히 바라보는 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아직 어리석은 사람들은 종종 기다리지 못하고 말하거나 SNS에 글을 쓰거나 행동하고 만다. 결국, 일을 그르치고 후회하게 된다. 사실 뭐 이것이 보통 사람의 삶이겠으나 너무 큰 후회가 남을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이들의 세계를 보면 가끔 그 시원시원함이 부럽다. 솔직하게 말하고 솔직하게 상처 입고, 솔직하게 인정한 뒤 털어버린다. 오해라는 것이 어른들처럼 그렇게 많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들이 아직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구태여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빠르면 1학년이나 유치원 때부터 벌써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꾸미기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다. 무척 불행한 아이들이다. 여러분이 교사나 부모라면 그런 아이에게는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고 충분히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이의 시기를 지나면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이 아닌 무엇으로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이로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좋다. 그리고 분명 훗날 유년의 그 기억이 지나치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을 제 자리로 끌어당기는 힘이 되어줄 것이 틀림 없다. 어릴 때 마음껏 놀게 하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에는 이런 함의도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나'는 근원적으로 신의 일부이다. 종교적으로는 '나'가 없다는데 '진짜 나'는 있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해를 입혔어!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정말인가? 정말 내가 해를 입었나? 


투사를 멈추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돌리는 일을 중단하면, 자신이 선명해진다. 자신이 선명해지면 보이지도 않는 진짜 나를 찾아 헤매는 시간과 노력도 줄어들 것이다. (타진요와 같은) 허상의 세계와 사투를 벌이는 수고를 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나는 또 무척 불필요한 일을 구태여 행하고 말았지만, 결론은 이렇다. 나는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뭔가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다. 



2015. 10. 12. 멀고느린구름.




오지브와족(Ojibwa) |


Chippewa라고도 함. 알공킨어를 쓰는 인디언. 현재의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노스다코타 주의 터틀 산맥에 이르는 휴런 호 동쪽 기슭과 슈피리어 호 양쪽 기슭에서 살았다. 캐나다 위니펙 호 서쪽에 살던 부족은 소토족이라고 부른다. 오지브와족은 여러 개의 무리들로 나뉘어 이동생활을 했다. 가을이면 가족 단위로 나뉘어 각자 사냥지역을 따라 흩어졌고, 여름이면 주로 고기 잡는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몇몇 무리들은 옥수수를 재배했으며 줄풀 열매를 채집해서 주식으로 삼기도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카누, 돔형 오두막, 주방 도구 등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추장이 따로 없었으므로 외혼씨족들이 전체 부족을 다스렸다. 추장의 자리는 원래 권력을 행사하는 직위가 아니었으나, 유럽 모피 상인들과 거래하는 동안 권한이 강화되어 부계를 통한 세습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녀가 모두 가입할 수 있는 비밀종교단체의 연례 행사인 미데위윈제(祭)가 오지브와족의 중요한 의식으로 매년 거행되었다. 주술회에 가입하면 초자연적 힘을 빌 수 있고 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지브와족은 식민지 개척 전쟁 동안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 미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인디언에 속하며, 20세기말에 미시간·미네소타·몬태나·노스다코타·위스콘신 주 보호구역에 약 3만 명(조상은 대부분 혼혈임)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캐나다 온타리오·매니토바·서스캐처원 보호구역에도 약 5만 명이 살고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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