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클레어의 카메라>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가정에서 비롯된다. 만약 내게 초능력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의 뒤에 ‘지구를 지킬 텐데’가 붙는다면 <슈퍼맨>이 태어나고, 만약 내게 진실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이라는 가정 뒤에 ‘왜 내가 해고를 당한 건지 알아낼 텐데’가 붙는다면 <클레어의 카메라>가 태어난다.
홍상수 감독의 스무 번째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관계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탐구’한다는 스스로의 영화 테마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주인공 만희(김민희)는 영화배급사 대표 양혜(장미희)로부터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 양혜는 가능하면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떠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영화 엔딩부에서 만희는 분을 억누르지 못하며 거칠게 박스 테이핑을 한다. 단지 이 두 가지 사건만이 영화 속 사실로 짐작된다.
하지만 만희는 양혜에게 해고를 당하는 바로 그 순간, 카페 테라스에 한가로이 누워 있던 검은 개를 쓰다듬으로써 묘한 존재 클레어(이자벨 위페르)와 연결되고, 양혜와 사진을 찍는 행위를 한다. 그로부터 가정의 세계가 시작된다. 흔한 여성형 이름인 클레어(clare)는 같은 프랑스어 발음을 지닌 클레어(clair)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클레어(clair)의 뜻은 ‘빛’, ‘밝히다’이다. 만희가 깐느의 해변에 있는 기이한 굴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볼 때마다 영화의 다음 장면에서는 프랑스 음악 교사라고 하는 클레어가 푸른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다.
클레어는 마치 르뽀 기자처럼 만희의 해고와 얽힌 인물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클레어가 처음 만난 인물은 영화배급사 대표 양혜의 비밀 연인이자 바람둥이에, 술주정뱅이인 영화감독 소완수(정진영)다. 소완수는 어김없이 클레어에게도 추파를 던지고, 클레어는 그에 이끌리는 듯이 소완수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희가 해고를 당했던 카페 앞을 지나고 역시 누워 있는 잿빛 개를 만짐으로써 만희와 연결된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을까. 어째서 가정법의 세계 속에 스스로 들어가, 거짓말로 쓰여진 것들에 웃고, 때로 눈물을 흘릴까. 그것은 아마도 영화와 소설이 ‘진실에 대한 상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며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감각하고, 맡고, 맛보지만 순간에 느낀 강렬한 1차적 오감은 종종 진실을 가리고 만다. “내가 봤어!”라는 말은 대단한 증언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할 때가 많다.
진실을 밝히는 요정과도 같은 클레어는 “사진을 왜 찍어요?”라는 만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아주 천천히.”
영화도 소설도 사진과 같다. 우리들이 지나온 순간, 혹은 앞으로 마주할지 모를 문제적 순간을 찍어놓은 것이다. 아직 촬영되거나 쓰여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지나간 삶 속에도 예술 작품이 될 법한 문제적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천천히 그 문제적 순간들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가정의 세계를 통해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진실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밤 중에 갑자기 상사가 마음을 바꿔 당신의 해고를 취소하고자 만남을 청할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짐을 싸야할 가능성이 더 높다. 클레어의 카메라에 찍힌 주정뱅이 감독처럼 대체 자신의 뭐가 바뀐 건지 도무지 모를 수도 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천천히 그 문제적 순간들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 우리가 마주한 진실이 지금은 무엇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다음 순간은 그로 인해 미묘하게 바뀐다.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작은 선택들의 변화는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우리는 훗날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18. 6. 19. 멀고느린구름.
* 이 리뷰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새로운 리뷰는 매주 화요일마다 HAGO Journal 란에 선공개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