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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ul 17. 2018

리스본행 야간 열차 / 태양은 아직 그곳에 있다

빌 어거스트 <리스본행 야간 열차>

* 이 글은 2015년에 썼던 리뷰 글의 98% 리메이크 버전입니다.




태양은 아직 그곳에 있다 


“우리가 머물던 곳을 떠날 때, 그곳에는 우리의 무언가가 남는다.  

우리가 떠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거기에 있다.”


석양 속에서 마지막 글을 남기는 또다른 주인공 아마데우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문예부실에 잡입해본 적이 있다. 졸업을 하고 수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글을 계속해서 써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느껴지던 여름이었다. 유난히 노을이 황금빛을 띠던 날이었다. 어쩐지 열려 있던 모교의 뒷문을 통해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나는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가 갈매기 같은 건물의 동쪽 날개죽지에 있는 문예부실 앞에 섰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건망증이 있는 편인 나는 학교를 다니던 3년 동안 종종 문예부실 열쇠를 집에 두고 왔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탁자에 혼자 앉아 지난날을 떠올렸다. 마치 교복을 입은, 머리카락 길이가 3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20세기의 남고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나 그 공간의 주역은 여러 번 바뀌었는데도, 아직 그곳에는 오래 전의 내가 남아 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의 주인공인 노교수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비가 쏟아지는 다리 위에서 자살기도 중인 빨간 코트의 여인을 구출한다. 여인은 코트만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지고, 코트 속에는 한 권의 소설책과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티켓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언가에 이끌려 열차에 오른다. 그가 도착한 리스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붉은 코트의 주인이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과 그가 어느날 포기해버렸던 뜨거운 삶이었다. 투명한 햇살이 일렁이는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에서 혁명의 시절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의 빛과 어둠을 만나며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타인의 글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곧 자기 자신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우중충한 스위스의 날씨와 달리 리스본의 거리에는 태양빛이 가득하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의 시대를 마감시킨 카네이션 혁명은 끝났고, 혁명가들은 사라졌지만, 뜨거웠던 청춘의 마음들은 여전히 리스본의 거리 곳곳에 머물러 있었다. 문득, 안도현 시인의 유명한 싯구가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의 열기만이 뜨거움이겠는가. 의도치 않게 타오른 사랑의 불꽃.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친구를 향한 열등감. 몽상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순진한 낭만성. 전해질 수 없는 마음의 뜨거움. 안온한 삶에 대한 욕망. 그 모든 것이 뜨거움이고, 빛이다.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뜨겁게 작렬하던 태양이다.  


어떤 이는 태양이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서 이글거리던 때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영원히 뜨거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은 태양이 정오를 지나 다시 먼 서쪽의 바다를 향해 기울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다가 어느날 싸늘하게 식어 버려, 우리는 그 순간부터 태양이 없는 저녁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게 된다. 너무 뜨거웠던 청춘의 정오는 저녁의 시간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강렬한 빛이 더 짙은 그림자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남긴다


강렬한 태양빛은 짙은 그림자를 만든다


문예부실에 잠입한 나는 복도에 줄지어선 창들이 캄캄한 밤으로 물들 때까지 머물렀다. 저녁의 시간이 왔지만, 정오의 내가 여전히 기다란 탁자에 앉아 어설픈 시를 쓰고, 편지지 속에 어리석은 사랑을 새기고 있었다. 바로, 그날 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동아리실을 닮은 특설 야간열차 말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나는 태양빛이 골목길 곳곳을 환히 드러내는 리스본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과거의 나를 비롯한 뜨거운 청춘들을 만난다. 우리가 한 시절을 떠날 때, 그 순간에는 우리의 무언가가 남는다. 우리가 떠나왔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그곳에 있다. 태양은 아직 그곳에 있다.


아직 그곳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이 사랑을 느낀 이를 남겨두고 리스본을 떠나는 기차 앞에 선다. 본래(?)의 삶이 있는 스위스로 돌아가기 위해. 여인은 마지막 질문을 한다.  

 

“왜 머무르지 않나요?”  


질문을 조금 바꾸면 다음과 같다.  

 

“왜 다시 태양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려 하나요?”


 아, 바로 지금, 나 자신에게 해야할 질문이다.



2018. 6. 27. 멀고느린구름.




* 이 리뷰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새로운 리뷰는 매주 화요일마다 HAGO Journal 란에 선공개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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