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변산>
고향에 대해 생각하면 두 가지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새벽녘의 먼 바다에서 들려오던 뱃고동 소리. 다른 하나는 붉게 물든 공터의 노을 속에 흩어지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다. 앞의 것은 부산 감천동의 풍경이고, 뒤의 것은 서울 마천동의 풍경이다. 유년시절의 나는 부산과 서울을 두 축으로 여섯 번이 넘는 전학을 경험했었다. 부산과 서울, 두 풍경 중에 나를 더 유년의 시간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뒤의 풍경이지만, 더 애잔한 마음에 젖게 만드는 것은 앞의 풍경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내 고향은 부산이 되기도 하고, 서울이 되기도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를 고향으로 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서울에서 성공한 래퍼가 되려는 학수(심뻑)와 고향의 공기를 담은 글로 소설가로서의 작은 성공들을 이루어 가는 선미. 두 사람에게 변산은 다른 얼굴로 간직된다. 고향에 남아 있는 건 증오하는 아버지와 불운했던 유년의 기억뿐인 학수에게 '변산'은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네
라고 읊게 되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떠나온 부산이 내게 더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온통 불운했던 기억들이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산을 떠올릴 때 들려오는 먼 뱃고동 소리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부산은 내게 새벽마다 푸른 슬픔을 실은 배들이 돌아오는 곳이었다. 가난과 불화, 폭력과 불합리, 좌절과 이별이 날마다 먼 바다에서 내게로 왔었다. 반면, 서울의 거리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 속에는 불행을 모르던 시절의 어리디 어린 내가, 아련한 풋사랑의 기억과 함께 살고 있다.
고향에 남은 선미는 고향의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돌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오롯이 마주한다. 학수가 상처를 안고 바라보던 변산의 노을은, 선미에게 닿아서는 가장 아름다운 자부심이 된다. 고향으로부터, 과거로부터 끝없이 도피하고자 하는 학수를 고향으로 부른 선미는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를 집요하게 뒤쫓는 무언가가 있을 때,
마주하지 않으면 영원히 달아날 수 밖에 없다.
청춘의 우리들은 항상 무언가에게 뒤쫓긴다. 과거의 상처와 미래로의 다짐에게. 그리고 다정하지 않은 세상에게. 어렵지만 언제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는 심호흡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영영 생에 쫓기면서 살 것인가, 오늘 패배하더라도 당당히 마주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나는 종종 도망쳤지만, 가급적 마주하며 연거푸 패배하고마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봐 안 되잖아, 영화랑은 다르다니까 라고 툴툴거리며 어설프게 뒷걸음질쳐왔다.
영화 <변산>의 천진난만한 해피엔딩을 바라보며, 나의 두 고향과 지금의 내 자리를 생각한다. 비록 뒷걸음질치며 밀려난 인생이지만, 어쩌면 우주의 예정보다 조금은 덜 밀려난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패배하였으나 속수무책으로 KO패하지는 않았다. 인생에게 한 대 크게 얻어맞고 나뒹굴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마주해보고자 했던 덕분이다.
학수처럼도 살고, 가끔 선미처럼도 살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영영 저 둘 사이를 오가며 살 것이다. 학수일 때는 유년의 붉은 노을을 그리워하고, 선미일 때는 푸른 뱃고동 소리를 경계하며, 파도에 밀려나더라도 다시 앞으로 노를 저어 갈 것이다. 내 마음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이 단순한 용기 뿐이다.
2019. 7. 2.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