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읽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시기 바로 전 해였던 2008년 봄. 군 입대를 앞두고 봉하마을을 찾았다. 우연히도 때가 맞아 자택 앞으로 시민들을 맞으러 나온 노무현 대통령을 아주 가까이서 뵈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동행이 있어 겨우 마음을 눌러 찔끔 눈가만 적시고 말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울어버릴 걸 그랬다. 펑펑 목놓아 울어버릴 것을 왜 참았나 싶다.
참여정부가 탄생하는 데 1표를 행사한 유권자였지만, 이후 대통령 노무현의 선택들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보수적 행보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에 동참했고, 새만금 삼보일배에도 참여했다. 천성산을 지키는 시위에도 나가고, 푼돈이지만 도롱뇽 소송 후원금도 보탰다. 그럼에도 내 손으로 뽑은 첫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보수와 진보매체가 합심해 악의적인 기사를 써내고,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비판하고 손절할 때도,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할 때도 나는 그래도 노무현이라고 여겼다. 나 역시 거리에서 비판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이 있었지만 노무현이 가고자 하는 '진보의 미래'만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지지율이 곤두박질 치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조롱할 때도 나는 정치인 노무현을 남몰래 사랑했다.
그때 내 마음과 같았던 정치인이 딱 한 사람 있었다. 유시민이었다. 그는 모든 정치인이 대통령에게서 손을 놓을 때, 끝까지 그 손을 붙잡으며 오욕을 뒤집어쓴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유시민 작가가 민주당계의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노무현 대통령의 꿈을 진정으로 계승하고자 '국민참여당'을 만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정당에 가입했다. 나는 참여당의 당원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내내 이어진 민주당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치인 노무현의 꿈은 당시의 민주당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인 유시민은 새롭고 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노무현의 꿈을 진짜로 실현할 수 있을 정치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이정희의 민주노동당, 심상정-노회찬의 진보신당과 힘을 합쳐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통합진보당의 슬로건은 '노무현과 전태일의 만남'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치실험은 실패했다. 통합진보당은 출범과 동시에 풍랑에 휩쓸렸고, 좌초되고 말았다. 난파선을 타고 참여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인천지역의 민주노동당 세력만이 망망대해로 나왔다. 진보정의당이었다. 진보정의당은 참여당 출신의 천호선(참여정부 대변인, 수석비서관) 대표에게 방향타를 맡겼다. 천호선 대표는 노무현과 전태일의 만남이라는 슬로건을 다시 부활시키고, 1%였던 정당의 지지율을 3-5%까지 끌어올렸다. 노동의 희망(전태일), 시민의 꿈(노무현) 정의당의 진정한 탄생이었다. 2012년이었다. 정의당은 원내정당 중 단일한 이름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민주당계의 거대 정당은 2015년 문재인 대표의 선출 이후에나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개혁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더불어민주당이 탄생하기 이전의 대통합민주신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등등은 스스로 개혁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해 늘 민주노동당 또는 진보신당에게 정치적 신세를 졌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의 복지 강화 의제들은 진보정당들과 노무현은 꿈꿨으나 민주당계 정치인들은 손사래를 치던 것들이었다. 민주당은 항상 한나라당, 새누리당과 어정쩡한 협상을 하며 거대 야당 자리에 만족했다.
작지만 선명했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진보당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더불어민주당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의당은 지난 8년 동안 꾸준히 민주당이 엉거주춤 물러서려고 할 때 앞에 서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해왔다. 민주당의 의석은 늘 100석 내외였고, 정의당은 한 자리대 숫자를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민주당은 늘 보수당보다 의석이 부족해서 일을 하지 못한다고 변명해왔다. 시민들이 민주당에게 새누리당보다 많은 의석을 주었지만, 민주당은 여전히 압도적인 의석이 아니어서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민주당의 변명에 참 오랜 세월 속아줬다. 지역구에 참여당, 진보신당, 정의당의 후보가 출마해도 결국은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줬다. 많은 진보정당의 유권자들이 그렇게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민주당의 후보에게 표를 줬다. 녹색당이나 사회당, 노동당의 유권자들은 때로 비례표마저 사표가 될까 싶어 비례마저 민주당에게 주기도 해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촛불을 들었던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새로운 시대의 영광을 독차지할 때도 나는 조용한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시작될 때부터, 2017년 3월 박근혜가 탄핵될 때까지 그 기나긴 9년의 세월, 거리에 누가 있었는지를. 불법 정리해고를 당하는 노동자들의 곁에 어떤 정당의 깃발이 있었는지, 4대강의 삽질을 맨몸으로 막아내며 어떤 정당의 활동가들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는지, 보수당의 악법에 누가 먼저 분노하고 소리를 쳤는지, 어떤 사람들이 오천 원 만 원을 모아서 버스를 대절하고 주말에 시간을 내어 약자들의 현장으로 향했는지, 해봤자 안 된다고 모난돌이 정맞는다고 뭐 하러 그렇게 애쓰느냐고 큰 정당의 사람들이 말할 때 먼저 촛불을 든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바로 그 모든 투쟁의 거리들에 개인으로서 묵묵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어떤 이들은 이렇게 부른다. 구좌파. 박근혜에 분노하여 자발적으로 촛불을 든 많은 시민들 중,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특히 좋아하는 팬덤은 스스로를 신좌파로 명명한다. 그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2016년 비로소 촛불이 타오르기 이전, 기나긴 8년의 세월 속에서 우리가 흘렸던 눈물과 땀, 좌절과 슬픔, 작은 희망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영원한 꿈은 헛되고 가벼운 말들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의당의 한 상징인 노회찬 대표가 2년 전 진보의 부끄러움을 품에 안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정의당은 정의당의 길을 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의당의 길이 무엇일까 요즘은 특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박근혜와 팽팽하게 맞붙었던 2012년,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심상정 후보가 사퇴를 하고, 정의당이 줄곧 민주당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개혁 경쟁의 파트너로 존중했던 8년여의 세월은 보수매체의 왜곡보도와 가짜뉴스, 이간질에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신이 난 보도매체들은 유례 없이 정의당이 민주당계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고 기사를 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의당은 창당 이래 언제나 거대 정당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왔다. 보수당을 공격하면 100석 이상의 거대 정당이 6석의 정당을 상대로 총공세를 펴왔고, 민주당과 개혁경쟁을 하자고 하면 지역구에 알박기를 한다느니, 비례의석 앵벌이를 한다느니 하는 조롱을 당했다.
모든 정당은 원하는 지역구에 자당의 후보를 낼 권리가 있고,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할 권리가 있다. 일정 규모를 갖춘 정당이라면 그것은 권리가 아닌 의무에 더 가깝다. 아무도 민주당에게 왜 지역구 후보를 내느냐고 힐난하지 않는다. 아무도 미통당에게 왜 지역구 후보를 내느냐고 조롱하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을 만들면, 스타트업 기업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만들어선 안 되는가? 스타트업이 새로운 스마트폰을 만들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장을 잠식해서, 중국기업의 시장진출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한국 정치계는 오랜 세월 힘을 가진 정당만이 계속 힘을 가져야 한다고 다른 생각을 가진 유권자에게 강요해왔다. 이 낡은 판을 갈아엎어보려고 '준연동형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아직 큰 힘을 갖추지 못한 정당이라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소수의 유권자가 있다면, 그 지지만큼 최소한의 의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정의당은 꾸준히 5% 이상의 지지를 받아왔다. 온전한 연동형이라면 국회의석 중 15석에 정의당이 자리해야만 5% 시민의 정치적 의사가 국회에 온전히 반영되는 것이다. 작은 진보정당들은 애처롭게도 이 제도를 오랜 세월 염원해왔다. 단 1석이라도 작은 목소리를 국회에 반영하기 위해서 말이다.
거대 보수당은 억지 논리로 이 숙원을 짓밟아버렸다. 정의당은 꾸준히 항거했지만 6석의 정당이 갖는 정치력은 100석이 넘는 거대 보수당에게 통하지 않았다. 선거법 개혁의 가치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약속했던 민주당은 손을 놓고 있다가, 안 되겠다며 약속을 스스로 깨버렸다. 연동형비례제가 되면 자신들이 받을 비례의석이 줄어드니 30석의 연동형 캡을 꼭 씌워야겠다고 주장했던 민주당은 오히려 모자(캡)가 불편하다며 본인들이 만든 모자를 벗어버렸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연동형 취지를 살려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겠다고 하더니, 본인들의 구미에 맞는 정당만 모인 안전한 곳에 들어가 대주주 노릇을 하고 있다.
정의당과 녹색당은 창당 8년, 미래당과 민중당은 창당 3년이 된 정당들이다. 그 구성원의 역사를 따라가면 2000년 민주노동당부터 시작된 진보정당 20년의 세월이 더해진다. 민주당은 결국 이 역사를 외면하고, 정치력이 불확실한 신생정당의 손을 잡았다. 위성정당이 아닌 연합정당이라며, 소수당을 배려하는 거라고 하더니 그마저 소수당에는 2석 할당이 끝이라고 한다. 나머지 8석은 플랫폼이라던 신설단체가 며칠 만에 급조한 후보들로 채우겠다고 한다.
정의당, 녹색당, 민중당 모두 이미 시민사회와 함께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경선을 거쳐 공정하게 각 당의 비례후보들을 선출했다. 각 정당의 정치적 자존심을 걸고 심사숙고해서 선출한 비례후보자들이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던 정치초보자가 갓 구성한 조직(시민을 위하여)에서 며칠 만에 급모집한 후보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자신의 삶을 바쳐 준비해온 진보정당 후보와
급조된 조직에서 우연히 기회를 얻은 후보 중
누가 더 우리를 위해 훌륭한 정치를 하겠는가
청년, 청년하며 소란을 피우던 정치권이지만 급조한 비례후보 속에 청년의 얼굴을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40대 이하의 젊은 정치인들은 대부분 진보정당의 후보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젊음을 지워버린 자리를, 거리의 역사를 외면해버린 자리를, 국회의원 뱃지를 복권처럼 노린 기회주의자가 대신 차지하고 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정의당 관련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참 많다. "노회찬이라면.", "노회찬이 살아 있었더라면."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노회찬을 모욕하지 말라."
노회찬 의원은 평생 동안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자와 여성,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서서 정치를 했다. 진작 민주당에 입당했으면 대통령 후보를 해도 몇 차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쉬운 길을 가기보다 바른 길을 가고자 했던 사람이다. 이득이 생기더라도 정도가 아니면 걷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단 한 번의 부끄러움에 무너져버린 사람이다. 노회찬 의원을 정말 아는 사람이라면, 곁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라면 노회찬 의원이 지금 어떤 말씀을 했을지 잘 알 것이다. 평생의 동지였던 심상정 의원에게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길이 맞습니다."
정의당의 선택이 유감스럽다. 정의당은 민주당과 손을 잡아서 손쉽게 11석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민주당 지지자 중 전략적 선택을 해줄 유권자도 거의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많은 정치 셀럽들의 우호적인 평가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매우 싫어하고, 미한당 지지자들도 아주 싫어하는 천덕꾸러기 정당이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미련한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정의당을 좋아할 수 있다. 모두 계산을 하고 있을 때, 계산기를 내려놓고, 그래도 이게 바른 길입니다 라고 말하는 정당이 하나 있어서 참 고맙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더 좋은 대우를 내건 고용주의 제안을 거절하고 어린 노동자누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정치인 노무현은 패배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옳다고 믿는 길을 바보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정의당의 길은 오직 그 한 길뿐이다. 청년 전태일과 바보 노무현의 길. 부끄러움을 알았던 정치인 노회찬의 길.
촛불혁명은 계산기를 두드린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결과가 아니다. 모난돌이 정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해봤자 안 된다.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느냐. 길고 긴 세월 동안 모멸 속에서도 자기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이 꽃을 피운 결과다. 타협하지 않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켜낸 결과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오직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바보들을 지지할 것이다.
정의당의 길은 오직 그 한 길뿐이다.
청년 전태일과 바보 노무현의 길
부끄러움을 알았던 정치인 노회찬의 길
2020. 3. 24. 멀고느린구름.
* 주요 Q & A
* 류호정 후보 해명 인터뷰 링크 (김현정의 뉴스쇼)
https://www.youtube.com/watch?v=kNuUycwbKQI&list=PLX6LonQ-H-DsYNq4OcB5VbgLKyiA46pAp&index=27&t=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