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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빌라 / 삶이라는 음악

전경린 <해변 빌라>

by 장명진


피아노를 좋아한다. 그 뿌리를 알 수 없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아마도 놀이터의 모래로 커피를 만들어 먹던 시절부터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다. 씽씽을 타고 동네의 골목길 사이를 달릴 때도 어느 집 창가에서 피아노 선율이 들리면 멈춰 서고는 했다. 심부름을 하러 슈퍼에 갈 때마다 동네 한 켠에 있던 피아노 학원의 간판을 올려다 보고는 했다.


중학생 즈음부터 심야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즐겨 들었다. 바흐와 모짜르트의 음악을 특히 좋아했다. 또래들이 랩과 댄스 음악에 심취할 때도, 고고하게 신승훈과 전람회, 토이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를 언제나 간절히 배우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아직까지도 교습 학원의 문 한 번 밀어보지 않았다. 대안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에 동료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기초 교습을 할 때도 쭈뼛거리다가 참여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실, 굳게 마음 먹으면 독학으로도 어느 정도 연주할 수 있을 텐데도 나는 좋아하기만 하고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다. 마치, 짝사랑하는 이를 오래 바라보기만 하고 선뜻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전경린 소설가의 <해변 빌라>는 피아노 연주를 하는 주인공 '유지'의 시선으로 해변 마을 속 인물들의 삶을 살핀다. 유지에겐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 그녀에게 가족은 이모 '손이린'뿐이다. 이린은 사실, 유지의 생모다. 하지만 유지는 이린을 어머니라 부를 수 없고, 부르지 않는다. 유지는 이린보다 이린이 사랑했던 남자, 이사경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생물 교사이자, 화가인 이사경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하며, 유지는 길고 긴 인생을 살아나간다.



피아노 소리는 한 음 한 음이 곧 끝이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끝이 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라면, 피아노는 매 음마다 완결되고, 완결된 낱낱의 소리들이 잔상을 남겨 하나의 음악을 이룬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모래톱 어딘가에서 반드시 스러지고 만다. 물거품이 된다. 모든 밀물의 파도는 까마득한 먼 대양으로부터 사라지기 위해 해변으로 달려온다.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물결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바다를 이룬다. 내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과 모래톱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일을 즐기는 것 사이에는 같은 뿌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째서 사랑을 하고, 꿈을 꾸는가. 힘껏 한 시절을 버텨보는가.



내게는 쇼팽의 음반이 없어서, 대신 드뷔시의 피아노 선율을 주로 들으며 <해변 빌라>를 읽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인생을 덜 오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움켜쥐는 순간, 모든 명확하던 것들은 피아노 음처럼, 파도처럼 곧 사라져버리고 만다.


우리는 어째서 사랑을 하고, 꿈을 꾸는가. 힘껏 한 시절을 버텨보는가. 결국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인데. 결국 우리는 먼 바다를 헤엄쳐서 어느 이름 모를 모래톱 위에 흩어지고 말 존재들인데 말이다. 가까이 보이는 삶의 순간 순간은 명징하지만, 또 그만큼 빠르고 덧없다. 하지만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우리가 한때 머물렀던 해변 빌라에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묘한 잔상들이 남아 있다. 사라진 것들 가운데, 사라지지 않은 것이, 흐려진 것들 가운데 덜 흐려진 것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잔상들과 잔상들이 손가락을 움직여 서로 깍지를 끼고, 음악을 만든다. 삶이라는 음악이다.


<해변 빌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아직은 너무 또렷하고, 날카로운 당신과 나의 이야기도 언젠가 슬퍼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우리의 시간들은 이 우주에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지만, 우리의 음악은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고. 모쪼록 이 책을 함께 읽지 못한 후회마저도 그 음악의 악장 속에 포함되기를 바란다.


2020. 3.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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