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페미니즘 읽기 1
1. 남성은 여성의 말이 불편하다
다행히도 내 남자사람 친구들은 '불편한 말'을 귀담아 들어준다. 스무 살에 처음 만난 우리들도 이제는 서른 중반이 되어 사실 자기 자신이 생각해온 방식을 바꾸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남성 친구들은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생각이 옳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 자신의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연성과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는 그 친구들을 나는 무척 존경하며 친애하고 있다.
임금에게 불편한 말을 일절 하지 않고, 달콤한 말들만 일삼는 신하를 우리는 '간신'이라고 한다. 임금이 불편한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것도 불편하지 않은 세상이란, 곧 더 나아질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더 나아질 필요가 없는 왕은 자신이 통치해 온 방식대로만 세상을 통치하려 할 것이다. 신하가 사실을 전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거짓을 전한 것이라면 임금의 통치 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던 백성들은 그 임금의 재임 기간 내내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의 문제만은 아니다. 보통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말을 수용하고 자신에 맞게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더 포용력을 지니게 되고, 더 조심스럽게 사람을 대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불편한 말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는 반대로 나이가 들 수록 더 시야가 좁아지고, 더 함부로 사람을 대한다.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어른은 젊은이의 말이 불편하고, 교사는 학생의 말이 불편하다.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과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말이 불편하다.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말이 불편하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을 스무 살 무렵 나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쪽의 주장에 생각이 기울어 있었다. 극단적 자유주의자로서의 판단이었다. 인간이 좀 더 자유롭게 모든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었다. 이 생각에 고맙게도 제어 장치를 달아준 것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활동하고 있던 여성 친구였다. 내가 성매매를 '인간'의 성적 자유라고 규정할 때, 그것은 인간이 아닌 '남성'의 성적 자유일 뿐이라고, 그러한 남성의 성적 자유는 여성의 성적 자유를 제한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기에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해준 친구였다.
나는 곧바로 반론했다.
여성에게도 성매매를 허락하자는 것이다. 서로 자유롭게 성을 팔고 살 수 있다면 공평한 것이 아니겠는가.
친구는 바로 대답했다. 여성에게 성을 팔 남성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성을 구매해서 즐거움을 느낄 여성의 비율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성매매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에서 여성의 성 구매율이 한 자리 숫자 이상이 될 것 같은가. 현재의 성매매가 지닌 문제는 그것이 성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막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성매매가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해서 경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여성, 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의해 성매매 현장에 감금된 여성과 그 열악한 상황을 활용해 돈을 벌고, 성을 구매하려는 현상 자체에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그 여성 친구의 말을 불편하게 여겼다.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자유롭게 살자는 게 뭐가 문제지. 다 큰 성인이 서로의 합의에 의해 거래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 뭐가 문제지...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차츰 내 판단을 멀리 유보하게 되었고, 더 이상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거나, 성매매에 찬성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그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고 정말 어떻게 하면 서로가 상처받지 않고 양 성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깊게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나는 성매매 찬성론자가 아니다.
2.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맨스플레인을 설명하려 드는 남자들
페미니즘 진영의 주장들은 한 마디로 말해 불편하다. 개그맨 장동민 씨가 방송에 나와 "여자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한 것은 극단적으로 페미니즘이 불편하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페미니즘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의 연합이다.
트위터 타임라인을 '맨스플레인'이라는 신개념어가 한동안 휩쓸었다. 바로 이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어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이 최근 내가 푹 빠져서 읽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다. 처음에는 이 책의 저자인 리베카 솔닛이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만든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리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어 자체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으며, 본인이 만든 말도 물론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직접 읽은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한 담론이 시작되면서부터 아주 재미 난 현상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뭐냐면 이 책을 읽지도 않은 소위 지식인 남성들이 '맨스플레인'에 대해 설명하고, 반대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표적 진보 논객도 끼어 있었다. 나는 이 현상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맨스플레인'의 총화라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 지식인의 허상을 비꼬는 영화로 일가를 이룬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하나를 슬쩍 꺼내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 깨나 읽었다는 다수의 남자들이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에 살짝 반감을 느끼면서,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 잘난 척하려는 본능은 여성에게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는 한다. 나는 이분들에게 그러니까 이 책을 지은 여성 리베카 솔닛의 말을 좀 잘 읽어보신 뒤에 말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리베카 솔닛이 짚어내는 문제는 '잘난 척'이 아니다. 솔닛이 제기하는 것은 여성을 지적으로 남성의 아래에 있는 성별로 인식하는 젠더 인식의 문제다. 충분히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남성 동지들을 타임라인에서 숱하게 보아서 내가 뭘 더 어떻게 쉽게 이 개념을 전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자. 우리끼리니까 좀 더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일말의 희망에 기대를 걸며 말이다.
자, 민수는 남성이다. 연희는 여성이다.
민수는 여자아이는 게임을 잘 못하고,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으며, 과학에 있어서 남성보다 전문지식이 떨어지고, 군대 사정은 1도 알지 못하는 동시에, 정치인 이름은 B급 영화의 조연 배우 이름보다 잘 외우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는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다.
연희는 게임을 잘 못하지만 게임 잡지 에디터 생활을 한 덕에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고,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지만 역시 잡지를 만들며 눈대중으로 살펴본 넓은 지식을 갖고 있다. 과학에는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어서 칼 세이건, 호킹, 도킨스, 파인만 등 유명 저자의 책들은 빼놓지 않고 섭렵했다.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전역한 육군 중령이다. 영화보다 현실 정치에 더 관심이 있어서 원외 정당의 대표 이름까지 모두 잘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말이다.
민수가 사이즈를 딱 보아하니 상대 여성 연희는 게임이나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본인의 기준으로) 여성이다. 자신 있게 썰을 풀기 시작한다. 연희는 민수가 말하는 게임이나 스포츠 인물의 세부 내용이 자신의 기억과 조금씩 틀린 것을 알아차리지만 초면에 실례할 수 없어서 잠자코 들어준다. 자신감이 붙은 민수는 교양 수업을 통해 익힌 물리학과 천문학 지식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뇌섹남으로서의 이미지가 굳혀지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한 민수는 여유를 갖고 군대에서의 활약성을 슬쩍 흘리고, 오늘날의 한국 정치를 걱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참다 참다 한계에 이른 연희가 반격을 시작한다. 민수가 낮은 수준에서 늘어놓은 과학 지식에 대해 전문 용어를 써서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민수가 이야기한 그런 방식의 영웅담은 군대에서 실현되기 어려우며, 원외 정당 대표는 최근에 000 씨로 바뀌었다고 말이다. 민수는 당황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서두를 꺼내놓는다.
"아아... 연희 씨가 여자라서 잘 모르시나 본데... 그게 그게 아니고요."
혹은 다음과 같을 수도 있다.
"아아... (연희 씨가 여자라서 잘 모르시나 본데...) 그게 그게 아니고요."
맨스플레인은 이처럼 설명자 남성이 청자인 여성에 대해 '여성은 ~에 대해서는 잘 몰라'라고 하는 성별적 전제를 바탕에 두고 설명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3. 모든 남성이 맨스플레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맨스플레인을 하는 이는 남성뿐이다
그나마 유연하고 똑똑한 남성들마저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에 반감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 혐의가 없는 자신도 부당하게 포함된다는 느낌을 느껴서다. 허나 리베카 솔닛은 책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모든 남성이 맨스플레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맨스플레인'은 모든 남성의 본능은 아니다. 마치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억제하면 사회적 사건을 일으키고 마는, 반드시 해소해야만 하는 불끈불끈한 성욕이 모든 남성의 본능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억울함을 느끼는 남성들은 조금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길 바란다. 단,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남성이 '맨스플레인'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맨스플레인'을 하는 건 남성들만의 특징적 현상이라는 것 말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종이 하도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떤 유니크한 여성의 경우에 자신을 명예 남성이라고 여기고, 자신과 같은 남성적 특성을 지니지 못한 여성을 향해 "보통 여자애들은 이런 걸 모를 거야"라는 전제를 갖고 맨스플레인을 시도할 수도 있다. 허나 이 경우에도 젠더적 '남성'에 의한 행위이기 때문에 '맨스플레인'이 남성들'만'의 특징적 현상이라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좀 더 엄밀하게 '맨스플레인'을 규정해보면 아래와 같다.
남성적 젠더를 지닌 설명자가 여성 청자를 대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특정한 분야의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판단을 전제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모든 남성이 맨스플레인의 용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남성(또는 여성이지만 명예남성)이라면 누군가에게 맨스플레인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맨스플레인은 당하는 상대로 하여금 모종의 모욕감과 자존감 저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지속적이고 집단적으로 행해진다면 청자에 해당하는 여성 전체에 장기적이고 연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쳐, 마음의 상처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유연한 남성이라면 구태여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주의할 것이다.
4. 주의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나 신호등을 주의할 때 우리는 보다 안전해진다
주의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나 신호등을 주의할 때 우리는 보다 안전해진다. 건강을 주의할 때 우리는 보다 오래 살 수 있다. 상대에게 하는 말을 주의할 때 우리는 보다 친밀해질 수 있다. 여성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주의할 때 우리는 더 손을 잡을 수 있다.
내가 보는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이 세상에 느끼는 불편함의 목소리다. 상대의 불편에 대해 우리는 모른 체 할 수도 있다. 혹은 미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칠 수는 있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불편하다는 사람에게 당신이 불편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이상하다. 그건 10년 동안 등산을 즐긴 사람이 이제 처음 산을 오르는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며, 상대방이 힘들다고 말할 때, 이상하네요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편함은 익숙하지 않음에서 온다.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누구도 누군가에게 무엇에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불편함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한 개인, 그 자신 뿐이어야 한다는 게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최소한의 합의가 아닐까.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맨스플레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대목은 구성상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대부분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불편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리베카 솔닛의 문체는 부드러우면서도, 재치와 힘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책은 솔닛의 문장들 그 자체만으로도 읽는 맛이 있어 감탄했다.
나는 페미니즘을 적극 지지하는 남성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불편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함께 힘을 모아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여긴다. 수사로서 여성들은 반 만년 동안 억압을 받아왔다고 말한다. 나는 그 대전제에도 동의를 하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인간의 평균 수명인 80년간 남성들에 비해 더 불편함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아주 단 적인 예로 남성들은 여성과 연애를 하다 헤어졌다고 해서 혹시 내가 상대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 밤 길을 걷다가 잘 알고 지내던 이웃집의 아주머니에게 강간을 당하는 일을 겪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아도 괜찮다. 결혼한 아내에게 밥을 제 시간에 차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얼굴에 멍이 드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
또 여성들이 비단 생물학적 남성에 의해 억압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논의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보다 근원적인 표현은 남성적 세상에 여성적인 것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의 문제나 인권, 노동의 문제가 페미니즘과 결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살펴보면 이 세상의 작고 여린 것들은 대체로 여성적인 영역으로 규정되어 오고 있다. 작고 약하고 여성적인 것들이 진정 해방이 될 때 우리 남성들의 해방도 함께 찾아온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 때, 우리 남성들도 여성보다 더 많이 경제적 지출을 해야 한다는,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강인해야 한다는, 울고 싶을 때도 남자답게 울음을 참아야 한다는, 여성에게 늘 성적으로 어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야 한다는, 덩치가 좋아야 한다는,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그 모든 암묵적 억압(이 억압은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고 있는 억압이 아니다. 남성인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기묘한 억압이다.)으로부터 함께 해방될 수 있다.
상대의 불편함을 들어주고, 상대를 우리와 평등한 선상에 자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자리를 잃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비로소 진정한 우리의 평등한 파트너를 얻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지고 있던 많은 짐들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성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여성이 아직도 제대로 된 법적 구제를 받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군가에게 성희롱을 하면 안 된다는 그 생각은 더 이상 뒤로 물릴 수는 없다.
평등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그 생각에 동의하는 남성 친구들이 오늘날의 양성평등에 대한 표준 의식을 구축해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돌이켜 보려는 우리들이 함께 연대하는 한 말이다.
2015. 8. 2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