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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25. 2016

"남자가 힘도 없어 가지고"라는 말을 듣기 싫다면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 즉문즉설 2

Q. "남자가 힘도 없어 가지고." 이런 말을 여자사람으로부터 종종 듣습니다. 이건 명백한 차별 아닙니까?


차별입니다(단호박). 생물학적인 남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물리적 힘이 세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며, 그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일입니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선입관과 차별에 반대합니다. 또한 '힘을 가진 남성이 힘이 약한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혹은 관념) 역시 페미니즘과는 큰 관련이 없는 마초이즘 혹은 서양의 기사도, 또는 동양적 가부장제의 여성(모성)보호론의 일환입니다.


만약, 주변의 여자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면서 질문과 같은 편견에 사로잡힌 발언을 하거나, 일방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주기만을 바랄 경우, 그것은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과는 어긋나는 것이라고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힘이 약한 남자로서 살아봤던 제 경험에 의하면 "사내 새끼가 힘도 없어 가지고"와 같은 말을 하는 성별은 압도적으로 남성이었음을 미리 밝힙니다.)


페미니즘에서 여성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은 남성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인권을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여성에 의해서도 보호될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 보호되기 이전에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아도 될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 수의 생물학적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에 비해 물리력이 비교적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키가 180에 몸무게가 70-90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남성이 주먹에 실어 보내는 힘과 키 160에 40-60 킬로그램 정도의 여성이 주먹에 실어 보내는 힘 사이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겠죠.


인간이 여전히 정글과 대평원에서 맹수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남성들이 타고난 물리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약자를 때려눕히는 것이 미덕이 되겠으나, 그런 야수 같은 수컷들에게는 죄송하게도 현대 문명 사회는 약자를 최대한 배려하고, 공존해서 살아가자는 것이 '암묵적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저 주어진 힘을 자기가 꼴리는 대로 사용하게 되면 법의 제재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이것이 억울하다고 하면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몇몇 아프리카 부족 국가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맹수는 자기와 동족인 암컷을 해치지 않습니다. 다른 '종족'을 공격할 뿐이지요. 인간 남성에게 인간 여성은 다른 종족인가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페미니즘이 '타고난 힘이 약한 남성'을 존중하며, '남자는 힘이 세야 한다는 편견'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타고난 힘이 약한 남성'은 마찬가지로 '타고난 힘이 남성 일반에 비해 약한 여성 일반'과 신체적으로 동일한 차별을 경험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리력이 약한 여성일지라도 물리력이 강한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과 같이 물리력이 약한 남성도 그 힘을 키우도록 강요 받지 않고 힘이 약하면 약한 그대로 강한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주장도 결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여성에게 밤을 허하라!"


이 구호는 2004년경 페미니즘 저널 이프의 대표 엄을순 씨께서 사회적 공론화를 시도하며 유명(아마도 페미니스트들에게^^;)해졌습니다. '여성에게 밤을 허하라!'는 구호를 요즘의 어떤 일간지에서 처음 접한 남성들 일부가 "남자들도 밤에 다니기 무섭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당시 이프에서 행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밤'의 행사 포스터


여성이 혐오 당한다고 하면 남성도 혐오 당한다고 하고, 여성이 차별 당한다고 하면, 남성도 차별 당한다고 하고, 여성이 힘들다고 하면, 남성도 힘들다고 주장을 하는 격인데요. 그렇다면 모두 그냥 혐오 당하는 채로, 차별 당하는 채로, 힘든 채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요? 어느 쪽이든 차별과 혐오, 어려움이 있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개선해나가고, 개선할 것을 개별 사안으로 단독주장하면 됩니다. 남의 주장에 소금 뿌리는 식으로 슬며시 끼워서 주장할 게 아니라요.


아무튼 '여성에게 밤을 허하라'는 구호는 다시 말해 '약자에게 밤을 허라라'는 구호와 동일한 맥락의 구호입니다. 여성에게 밤이 위험한 것은 여성들이 물리적, 사회적 약자로서 야간 범죄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월등히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야간범죄의 가해자들은 대다수가 물리적, 사회적 강자인 남성들입니다. 물리적, 사회적 강자인 남성들은 '당연히' 물리적 사회적 약자인 남성 또한 범죄의 목표로 설정합니다. 그들이 범죄를 시도할 수 있는 이유가 자신이 다른 이보다 '강하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물리적 사회적 힘이 약한 여성과 이와 유사한 조건의 남성은 서로 공동의 피해자이자, 연대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며, 페미니즘은 이를 지지합니다. 단, 범죄가 일어나는 양상을 보면 좀 더 복잡한 구조가 있습니다.


센 남성(극히 일부의 센 여성) -> 약한 남성(중간 피해자) -> 더 약한 여성(최종 피해자)


이런 형태의 정글식 먹이사슬(?) 구조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번 더 기묘하게 구조가 복잡해지는데요.


센 남성 - (물리적, 사회적 보호) - 더 약한 여성  VS  약한 남성 - (물리적, 사회적 가해) - 더 약한 여성


센 남성에게 공격 당한 약한 남성은 센 남성이 보호하고 있는 더 약한 여성을 센 남성과 동일 시하여, 센 남성을 공격할 수 없는 분풀이를 '대신' 더 약한 여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해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더 약한 여성은 센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고, 이 의존하는 관계가 약한 남성의 눈에는 마치 서로 한통속인 것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여성 상위 사회'라는 착시현상도 사실 이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센 남성에게 보호받는 여성은 마치 센 여성(이른 바 사모님 그룹?)처럼 보이거든요.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가장 근원적으로는 센 남성이 약한 남성과 더 약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근원적 해결책은 언제나 해결이 가장 어렵기에 '먼저' 약한 남성이 더 약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면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겠죠.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면 더 약한 여성도 굳이 센 남성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고 약한 남성이라도 파트너로서 편안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겠지요.)


이렇게 구조적으로 약한 남성이 센 남성보다 빈도 면에서는 더 많이 여성을 공격하거나 착취하는 현상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함께 센 남성에게 피해를 당하는 약한 남성이라고 해도 페미니스트가 일단은 모든 남성을 경계하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한 남성이 자신이 센 남성에 의해 피해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일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당하고 있는 여성에게 손을 잡자고 나서면 페미니스트는 당연히 환영하며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약자끼리 연대합시다


[힘을 남용하는 센 남성(극히 일부 센 여성) = 사회의 10%] VS [더 약한 여성 + 약한 남성 = 사회의 90%]


이렇게 아름다운 연대의 구조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권력을 지닌 자가 함부로 약자에게 물리적, 경제적 폭력을 남용하지 못하는 진정한 평화와 안전이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 연대의 한 구체적 모습이 바로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여성 혐오에 반대한다고 함께 나선 많은 남성들과의 연대일 것입니다. 여성 혐오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여성의 피해 상황만 골라서 반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행해지는 피해에 동시에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기서 '여성'은 생물학적 의미의 여성뿐 아니라 사회구조적 최약자의 위치에 있는 모든 약자의 상징개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에 의거해 여성 혐오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인간 혐오에 반대한다든가, 여성 차별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인간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든가 하는 주장은 모두 개똥이 됩니다. 페미니즘에서 정의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은 모든 '인간적(엄밀하게는 젠더적) 약자'를 통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페미니즘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한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과연 누구를 지켜야 할 것인가, 누구를 존중해야할 것인가. 그 가장 최전선에 인류 사상 가장 많은 인간적 피해를 경험하고 있는 인류 절반의 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최전선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인간성 회복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페미니즘적 생각입니다.


가장 약한 여성에게 밤을 허락하면, (그보다는 강한) 약한 남성에게도 자연스럽게 밤은 허락됩니다. 그러니 여자만 밤이 무섭냐고 울지 마시고, 눈물을 닦으세요.



첫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아무리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도 함부로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힘이 약한 남성에게 차별적 발언이나 편견에 의거한 인식을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 약한 남성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실질적으로는 강한 남성이 되어 더 약한 여성을 함부로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약한 남성'은 '약하다'는 권리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겠지요.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살해한 남성이 경찰서나 법원에 가서 "저도 꿈이 있었구요. (울먹). 저도 잘 살고 싶었는데요. (울먹) 그런데 저 여자가..." 라며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어필하는 것은 참으로 꼴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아마도 죽거나 피해를 입은 여성은 그보다 더, 혹은 적어도 그만큼 사회적 약자였을 테니까요. 약자가 약자를 공격했을 때, 더 이상 가해자는 약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공격의 순간 그는 강자가 되었으니까요.


2016. 5. 25. 멀고느린구름.


뱀발 : 만약 남아를 키우는 부모님이시라면 절대로 아이에게 '남자답게 행동해라'든가, '넌 남자애가 왜 그렇게 힘이 없냐', '남자애가 왜 그렇게 소심하냐', '남자애가 무슨 핑크색을 좋아하냐' 등과 같은 일방적 남성상을 강요하는 말들을 하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네요. 그 아이들이 자라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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