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no. 35
나는 하늘의 색을 찾고 있다. 그건 어느 시절의 하늘이었을까. 황금과 귤 사이의 빛깔이었고, 적당히 식은 보리차의 온도를 지니고 있을 듯했다. 외롭고 긴 구름들이 지났고, 여름이었으나 바람은 서늘했다. 무성히 자라난 수풀 끝자락마다 주홍색 햇빛이 앉아 있었다. 나는 강가를 따라 무심히 걷고 있었고, 하루를 보낸 새들이 둥지를 찾아 돌아오고 있던 저녁이었다. 한없이 쓸쓸했으나 이유 없는 긍지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 괜찮아 라는 말을 혼자 되뇌일 필요도 없었다. 뚜벅뚜벅 걷다가 하늘을 문득 올려다보았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색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 개 층위의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진 빛깔들이 수백 마디의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춰 서서 대기의 저편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몇 년 동안 계속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느낌이다.
요즘은 무사히 지내고 있다. 무사하다는 것은 어떤 걸까. 월세 납입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 사랑을 하고 있지도, 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 내 복권은 당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주위에 꿈이 뭐냐고 묻는 이상한 사람이 없는 것. 잘 지내요?라는 질문에 미소를 꺼낼 수 있는 것. 무사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든다. 무사한 나날은 가장 위태로운 나날이기도 했다. 외줄 타기처럼 잠깐의 방심으로 무사하지 않음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우리들은 누구나 무사하기 위해서 무사하지 않은 순간들을 보낸다. 신념과 다른 결정을 하고, 반칙을 숨기고, 뒤에서 욕을 하며, 작은 경고들을 무시하고, 조언을 조롱한다.
나는 어제 가게에 찾아와 내가 만든 음식에 불평을 늘어놓은 사람의 인스타그램을 검색했고, 대학시절 혐오했던 동아리 선배의 이메일 주소를 도용해 만든 계정으로 로그인해 “연예인병 5G네”라는 악플을 단 후에야 무사함을 얻었다. 냉장고에서 화이트와인을 꺼내 사과맛 데미소다와 섞어 마셨다. 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가 거실에 들어오도록 했다. 친절하기 위해서는 친절하지 않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서비스업 종사자와는 함께 살 수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읽다 멈춘 책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겼다.
저녁의 풍경도, 오전이나 오후의 풍경도, 주말의 풍경마저 지루하게 비슷하다.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전화번호부라는 게 있었다. 2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책이었는데,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다를 게 없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가끔 전화번호부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장 한 장 넘겨보고는 했다. 무사하다는 건 무심히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과 비슷하다.
손님이 오지 않아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나와 강변을 걷고 있다. 찾아보려던 하늘의 색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떠올려보니 그때 강변이 아닌 해변을 걷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청춘이었다. 여름이 시작된 지 벌써 오래임에도 사람들은 이제 정말 여름이 시작되려나 봐요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결국 계절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간밤에 내린 비가 공기를 씻어놓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니 기분이 좋다. 이름 모를 하얀 새가 구름과 구름 사이의 공백을 가른다. 바람 속에 비 냄새가 남아 있다. 한 없이 쓸쓸한 것은 예전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내 안에 머물던 이유 없는 긍지는 사라졌을까. 누가 그걸 가져가버린 거지? 서서히 밤이 낙하한다. 긴 강의 끝자락에 오늘의 빛이 손바닥 만한 크기로 남아 있다. 황금과 귤 사이의 빛깔. 아, 내가 찾던 게 뭐였더라…. 싱그러운 여름날이었다.
2020. 7. 1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