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달에 이끌리다
오늘 낮에 혼자 학교를 거닐다 C와 C의 연인을 보았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손을 꼭 쥐고 벤치에 앉아 있는 C와 C의 연인. C는 내가 알던 C가 아닌, 너무도 낯선 C였다. 난 처음으로 인정했다. C가 사는 세계는 다르다는 것을, 내가 사랑한 건 내 세계에 가두어 놓았던 버츄얼 C라는 것을. 술을 마실까 하다 귀찮아져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꿈속에 버츄얼 C가 나타나 내 손을 꼭 잡았다. C와 나는 닫힌 방에 갇혀 있었다.
흰둥이가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기 시작했다. 혹시나 엄마의 냄새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다리 난간에 묶여 있던 끈을 풀어주었다. 흰둥이는 바닥에 코를 바짝 대고는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의외로 냄새를 잘 맡는 듯했다. 내 가슴속에 기쁨의 폭죽이 터질 준비가 되고 있었다. 흰둥이는 갑자기 뛰었다. 나도 뛰었다. 달빛이 고마웠다. 흰둥이는 열심히 뛰더니 다리 끝에 가서는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달빛이 미웠다.
너도 세계가 참 좁구나. 네 세계를 넘어가 봐. 애기처럼 끙끙거리지만 말고 말이야. 난 너를 못 키워준대도. 너는 도둑고양이처럼 홀로 꿋꿋이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기 싫음 지금 용기를 내. 후회할 일 하지 말고, 지금 엄마를 찾아와! 이 울 보 멍멍아.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밑에 흐르는 물처럼 지나쳐 가고 있어. 네 엄마의 냄새처럼 모든 것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증발해버려. 그러니 찾을 수 있을 때, 쫓을 수 있을 때 쫓아가. 그렇게 못하겠다면 저 침대로 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려. 후회 말고, 미련 갖지 말고. 너의 선택을 존중해. 알겠니? 내 말 이해하겠니? 그렇게 글썽거리지 말고, 자 선택을 해.
-개는 몇 바퀴 돌다가 버려진 침대 쪽으로 다시 돌아간다-
겁쟁이. 아니야, 좋은 선택이야. 기다려보자. 엄마 찾으러 간 동안 엄마가 돌아오면 어쩌겠니. 물론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참, 내 시시껄렁한 사랑 얘기 어땠어? 그래 너무 시시껄렁해서 대답도 하기 싫은 거구나.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와 나는 한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렇게 오늘 처음 보았는데도 말이야. 인간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는 건, 인간은 공상을 하기 때문인지도 몰라. 어때 그럴 듯 하지? 너도 그렇게 느끼지?
흰둥아, 시간이 많이 늦었어. 지금은 방학이긴 하지만 난 내일 알바도 하고 해야 해서 이만 자야 돼.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래도. 자꾸 그러면 신해철 씨를 부를 거야아. 어? 보고 싶다고? 하하 사실 나도 그래. 나 신해철 팬이거든. 노래 불러 줄까? 끈 풀어줄 테니 따라와. 내가 함께 있는 걱정 말고. 같이 가면 안 무섭지? 자 우리 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자.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 하는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타인의 세계로 가는 문은 좁은 문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 작아지는 방법뿐. 타인의 세계로 가기에 나는 아직 너무 컸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흰둥이와 나는 달빛에 이끌려, 붉은 꿈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냇물처럼 흐르듯 걷고 있었다. 냇물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서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리고 30대 초반으로 뵈는 남자가 조깅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제기천을 수차례 돌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자정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다시 다리 쪽으로 뛰었다.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던 흰둥이도 영문도 모른 채 뛰었다. 다리로 돌아와 버려진 침대 위에 다시 앉았다. 흰둥이가 무릎 위로 올라와, 퍼질러 앉았다. 조심스레 흰둥이를 다시 다리 난간에 묶었다. 흰둥이는 끈을 다시 묶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흰둥아 걱정 말아. 넌 구원받을 거야. 너는 우리 사람과 달라서, 누구의 세계든 쉽게 들어갈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쉽게 왔듯, 나도 너에게 쉽게 갔지만, 우리의 만남이 쉬운 건 아니야. 흰둥아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 사랑해. 너도 용기를 내. 잠시 아프겠지만, 아픔 없이 성장할 수는 없는 거란다. 저 달빛과 나의 기도가 널 지켜 줄 거야. 안녕.
나는 흰둥이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흰둥이가 눈물이 괸 눈으로 날 보며 끙끙거렸다. 헤헤, 이 울보. 나는 웃으며 일어나 손을 한 번 가볍게 흔들고는 냅다 뛰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흰둥이의 울음소리가 제기천에 쩌렁쩌렁 울렸다. 돌아서고 싶지만 그건 흰둥이를 더욱 괴롭히는 일이 될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는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뒤에 숨었다. 어둠이 나를 덮어주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이렇게 숨을 곳이 있다.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의 엔진을 공회전시킨 채 주차된 자동차 뒤에 숨어 있을 런지도 몰랐다. 흰둥이는 지옥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양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기도했다. 허나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닌 나는 딱히 기도할 대상이 없었다. 순간, 책을 통해 알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위대한 영에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나 부처는 지금 여기 없지만, 위대한 할머니인 달님은 저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 달님. 위대한 영이신 와칸탕카여, 저 불쌍한 강아지를 도와주세요. 저와 같은 숨을 나눈 저의 형제인 저 강아지를 도와주세요. 저 소중한 생명을 버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이 이 삶에서 제게 요청하는 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충실히 해결해 나가겠습니다. 저의 이 마음을 믿고 지금 한 번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과 어머니 대지 위의 모든 생명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저의 문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초대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할머니의 부드러운 달빛으로 흰둥이를 감싸주세요.
기도가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 조깅하던 30대 남자는 흰둥이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남자는 흰둥이에게 다가가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베리안 허스키도 흰둥이를 핥아보는 듯했다. 흰둥이는 울음을 그쳤다. 남자는 잠시 흰둥이를 어르더니 다시 일어서서 다리를 건너가려고 했다. 나는 주문을 외듯 계속 기도했다. 흰둥이는 울고, 그런 흰둥이가 안쓰러웠는지 시베리안 허스키는 주인 남자가 잡아 당겨도 꿈쩍 않고, 흰둥이를 핥으며 보듬어 주었다. 결국 남자는 흰둥이를 풀어 한 손에 안고 시베리안 허스키와 다리를 건너갔다. 멀리 냇물 건너편에 남자의 손에 들려가던 흰둥이와 어렴풋이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 피식 웃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달과 위대한 영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울타리를 넘는 건 이제 나의 차례인지도 몰랐다. 달빛이 밝아지며 물의 마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