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달빛 밤에 2

여름 밤, 달에 이끌리다

by 장명진

하얗고 비쩍 마른 잡종 강아지를 안고 있는 붉은 스웨터 차림의 아주머니를 본 것은, 작사 작곡해서 부르고 있던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두운 다리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애틋하게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창작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들켜버린 민망함이 앞섰다. 나는 노래를 클라이맥스서 뚝 잘라 먹고, 평범한 산보객인 척 유유히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허나 제3자의 입장에서는 신나게 노래하다 뚝 끊고, 표정 싹 바꾸며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 정신이상자 마냥 느껴졌을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최고조의 즐거움은 최고조의 쓸쓸함과 맞닿아 있는 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게 그렇듯이.


들어봐. 흰둥아. 뭐? 왜 흰둥이라고 자꾸 부르냐고? 아, 그건 예전에 내가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 흰둥이여서야. 너랑 좀 닮았어. 왜? 이름이 너무 촌스럽니? 미안 미안 내 센스의 한계란다. 이담에 좋은 주인 만나서 멋진 이름을 선사받으렴. 세바스찬 같은 거로 말이야. 하하 이것도 촌스럽긴 마찬가지구나. 아무튼 말야. 버림받는 건 참 힘든데, 이별에 면역은 없어. 되려 많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이별이 아픈 거 같애. 이별을 하며 이전의 이별과 버림받은 기억이 와락 오버랩되거든. 아, 오버랩은 겹친다는 뜻이야. 그것처럼 사랑해 본 사람이 사랑의 기쁨을 잘 느껴. 근데 그만큼 사랑의 아픔에도 민감하게 되는 것 같아. 넌 그래도 다행인 케이스야. 이번이 첫 이별이잖아. 첫 고통이잖아. 맞지? 너 보니까 태어 난 지 1년도 안 됐겠다. 이구 불쌍한 것. 사실은 나도 엄마한테 버림받아봐서, 네 마음 잘 이해가 돼. 나 중학교 때 엄마가 출가하셨거든. 우리 집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어. 제대로 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어. 근데 이제 되뇌어 보니 가장 뒤죽박죽인 건 바로 나인 것 같아. 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야. 어쩜, 지금 갑자기 싸해져서 네가 울든 말든 뻥 차버리고 도망갈지도 몰라.


왕!


깜짝이야 너 어린 게 되게 똑똑하구나.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말이야. 나는 안 그럴 사람 같지? 그치? 근데 세상에 안 그럴 것 같은 건 없어. 누구나 다 자기도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은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정말 비밀이야. 나의 비밀을 살짝 볼래? 저리 꺼져! 이 똥개새끼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리 반대편으로 차갑게 걷는다.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작은 돌을 집어 빗맞게 던진다. 개는 약간 움찔하더니, 더욱 더 소리 높여 발광한 듯 짖는다. 다시 개에게로 다가간다-


미안 미안. 장난 그냥 쳐 본거야. 장난 한 번 살벌하게 하지? 자 이리와.


-강아지를 품에 안는다-


에고 우리 흰둥이 우는 거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네. 울보 흰둥이. 끙끙거리지 말래두. 아니다 그냥 계속 끙끙거려. 내가 안아 줄게. 네 엄마는 대체 어디 갔니?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 모두 어디에 숨었니?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너무 멋없게 고백했다가 차였어. 아, 인과관계를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고백이 멋없어서 차인 건 아니야. 내가 소설 같이 얘기해줄게. 정말 시시껄렁한 소설처럼 말이야.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운명의 바람처럼 C를 만났다. C는 인기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내가 C를 보고 있을 동안, 다른 남자애들은 모두 A나 ㄱ, ㅂ을 보고 있었다. 나는 좁은 세계 속에서,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C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C는 울타리 밖에 있었다. 울타리 밖의 세계에서 C는 인기 있는 여자였다. 내가 사랑한 여자는 인기 없으면서, 인기 있고, 여기 있으면서, 저기 있는 여자였다. 마치 비틀즈의 '노 웨어 맨(No Were Man)' 같이.


C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아니 없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 C는 실론티를 좋아하는데, 실론티는 맛있으면서도 품위 있고, 매니악했다. 붉은 홍차의 꿈은 붉은 사랑의 꿈과 환치되었다. 그건 낭만적인 일이었다. C는 나와 같은 D대인데, D대는 명문이고 그녀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미술 특기자로 입학했고, 수능 성적은 중위권이었지만 말이다. 그녀와 사랑하는 것은 2세를 위해 너무도 현명한 일이었다. 그건 합리적인 일이었다. C와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합리적인 사랑이 틀림없었다. 해보진 않았지만 분명 그럴 게 뻔했다. 나는 C처럼 실론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훗날 C와의 사랑에 대한 총평을 내라 한다면 ‘실론티 속에 모든 게 있습니다’라고 할 작정이었다. C는 늘 혼자 수업을 들었다. A, ㄱ, ㅂ 의 주위에는 꼭 남자들이 셋 이상은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C옆에 앉았다. 앉을 자리가 그곳밖에 없었다. 아니 대강당이었으니 어쩌면 자리는 많았다. 하지만 운명처럼 내 눈에는 C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나는 C와 무려 영화까지 같이 보게 되었다. 남녀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연인 사이에나 하는 일 아닌가. 물론 착각이었다. 아무튼 단 둘이 공원에도 가고, 이름만 없는 데이트를 몇 차례 했다. 어느 덧 나는 C가 내 연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내가 살던 세계의 범주에서의 얘기다. C와 나는 절친했고 많은 고민을 나눴다. 그 사이 나의 세계에서는 많은 지각변동이 일었다. A와 ㄱ에게 오빠인 남자친구가 생겼고, 좌절한 동기 남자애들은 ㅂ에게 몰렸다. 이에 환멸을 느낀 ㅂ이 반을 떠났다. 새내기 남자애들은 다들 미숙했다. 나는 예외인지 알았다. 나도 미숙했다는 것은 최근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C의 세계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C에게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고, 그 중에 어느 오빠와 C는 운명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내 세계의 일만 알았지, C의 세계는 몰랐다. 서로의 세계는 파묻힌 고대문명처럼 깊은 곳에 감춰져 있었다. 숨겨진 진실은 어디서든 언제든 부를 수 없었다. 우리는 다들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같은 세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사랑이란 서로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지, 세계 자체를 통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지만, 현실적인 선택은 교류일 뿐이었다.


어느 여름의 절정에 나는 재미없는 고백을 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C의 세계로 가는 문은 스르르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듯이 닫혔다. 내 마음도 닫히고,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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