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달빛 밤에 1

여름밤, 달에 이끌리다

by 장명진

물은 마법사야. 왜냐고? 왜냐면 물은 마법을 쓰거든. 자 저 물결 소리를 잘 들어봐. 밤의 기운은 물의 마법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 쪼르르 쪼르르... 저 소리가 나에게는 쓰르르 쓰르르 귀뚜라미 소리가 같이 쓸쓸하게 들려. 그래, 녀석 눈치챘구나. 물의 마법은 쓸쓸함이야. 눈가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하지만 울지 마. 이건 그냥 마법에 걸린 거뿐이니까. 세상에는 어쩌면 즐거운 일뿐인데, 우리만 어쩌다 마법에 걸린 거뿐이니까. 그래, 너와 나 우리 둘만 말이야. 녀석 사내 녀석이 끙끙거리긴. 어 근데 너 사내 녀석 맞아?


왕왕!!


어 그래 그래 알겠다. 사내 맞구나. 근데 니 엄만 도대체 어디 간 거니? 니 엄마도 우리처럼 마법에 걸린 걸까? 이 마법을 푸는 약은 왕자님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떡하지? 야, 달빛이 참 밝다.


나는 다리 난간 밑에 비밀스레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았다. 반대쪽 난간 밑 역시 보았다. 물에 홀려 혹시 흰둥이의 엄마가 뛰어내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리 밑으로는 달빛만 풀려 흐르고 있었다. 흰둥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뒤꿈치를 바짝 따라왔다. 저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면 힘도 없는 게 왕왕하고 짖어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버려진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흰둥이는 뱀처럼 스르륵 기어와 내 무릎 위에 똬리를 틀었다. 흰둥이의 눈 속에 물에 풀린 달이 있었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니었어. 이러려고 너를 쓰다듬은 것도 아니야. 흰둥아, 도대체 엄마는 널 두고 어디 간 거니?


요즘 들어 야행성이 된지라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어떻게 시간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밤이 되면 동이 트듯 정신이 깨어났다. 어쩌면 그건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멋없는 고백을 한 뒷날부터의 일인지도 몰랐다. 늘 그랬듯이. 사실은 이제 겨우 이주일 째지만.


밤 10시에 집을 나섰다. 누구에게나 함박웃음을 선사하는 싱글벙글 아저씨의 싱글벙글마트에서, 실론티 한 캔을 샀다. 그리고 곧장 제기천행이었다. 제기천의 밤은 아름다웠다. 밤은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밤의 아름다움을 끌어다 덮었다. 제기천을 산책하는 일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유키 구라모토를 듣는 것 같은 우울함과 편안함을 선사했다. 우울함이 편안함이 되다니 틀림없이 난 우울증이었다.


‘붉은 홍차의 꿈’이라는 실론티의 광고 카피는 밤이면 붉게 점등되는 제기천의 가로등과 어울렸다. 난 늘 실론티만 마셨다. 실론티, 티, 복숭아티, 데자와. 하여간 종류도 많은데, 왜 하필 실론티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런 걸 일일이 귀찮게 물어볼 사람도 없겠지만, 누가 정말 궁금해 죽겠다고 한다면. 광고 카피가 멋져서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하지만 미연방수사국의 멀더 씨가 증언했듯, 진실은 언제나 멀리 있었다. 내가 유독 실론티만 마시는 까닭은, 내 대학 첫사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음료수였기 때문이었다. 아, 너무 싱거운 얘기였다.


나는 늘 제기천을 걸으며 소설을 쓰듯 생각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나는 무언가 그립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가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냥 노래나 부르자고 나는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독백을 하고는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주로 물망에 오르는 노래들은 전람회나 토이의 노래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전람회의 ‘첫사랑’ 은 나의 모든 감정의 코드와 일치하는 놀라운 노래였다.


더 높게 보이고 더 크게 보였지

내가 아닌 마음에 난 눈물을 흘리고

잡을 순 없었어 가까이 있지만

숨겨진 네 진실은 난 부를 순 없었지...


세상에 그 누구도 숨겨진 진실을 부를 순 없었다. 그것은 신을 몸에 담는 샤먼도 마찬가지. 모두가 이 밤의 제기천 마냥 검게 얼굴을 가리고, 붉은 꿈을 꾸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냇가를 따라 걸었다. 물은 계속 주문을 외웠다. 달의 인력도 내 마음을 끌었다. 내 마음은 더 이상 내 마음이 아닌 것처럼, 달과 물을 따라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종종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더벅머리 아저씨가 물 만난 고기떼처럼 신나게 쉭쉭 지나갔다.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리고 조깅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에 신경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 신경 쓸 거라 여기고 고음에서는 자진해서 슬며시 볼륨을 줄였다.


볼 수는 없었지 마음 깊은 곳까진

언제나 한 발 멀리서 그냥 웃기만 했어

추운 날이 가면 알지도 모르지

겨울밤의 꿈처럼 어렴풋하겠지만

잊을 순 없겠지 낯익은 노래처럼

버려진 수첩 속에 넌 웃고 있겠지 우우 우우우...


어때, 이 노래 좋지? 야, 부끄러워 말고 좋음 왕왕 짖어봐. 계속 그렇게 울상 짓지 말고. 그래 내가 네 심정은 이해하는데, 나라고 그냥 웃어줄 밖에 깊은 속은 어쩌겠니. 어, 이 대사하고 보니 방금 노래 가사다. 아, 오랜만에 명언하나 남기나 했는데 안타깝다 안타까워. 나는 언제쯤 호랭이 가죽 같은 명언 한번 남겨볼까.


춥니? 이리와 이리와. 에유 쬐그만 녀석이 한 여름에 오들오들 떨고. 바보 같이 엄마가 널 여기다 묶어 놓는 거 보고 눈치채고 엄마 손가락이라도 콱 물었어야지. 하긴 그 아줌마 좀 힘세게 생겼더라. 야, 내가 유일한 목격자라고 널 양육해야 할 의무는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자취생이라 널 집에서 못 키운다구. 참, 네가 자취생이 뭔지 알 턱이 없지. 에... 자취생은... 나처럼 오밤중에 일없이 쏘다니는 인간들이야. 이제 알겠지?


우리 벌써 한 시간 째다. 아무래도 네 엄마 안 올라나봐. 사내놈이 낑낑거리지 말라니까안. 아니다 아니다 나도 사내놈이 그 말 때문에 당하고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역시 사람은 당한 대로 자라는 지도 모르겠어. 배신당한 사람은 배신하고, 맞아본 사람은 때리지. 보고 겪은 대로 자란다는 걸 다들 모르나 봐. 아니 알면서도 후회할 행동 후회할 말들을 하는 것이겠지. 너희들 멍멍이들도 그런 말들을 하니?


흰둥아, 물의 마법이 점점 세지는 것 같지 않아?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라는 유명한 재즈곡이 있는데, 지금 내 심정이 딱 그 노래 같애. 어쩌면 네 엄마는 너를 여기 묶어 놓고 저 달빛 속으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르겠어. 형체도 흔적도 없이. 무거운 쓸쓸함만 여기 부려놓고 새털처럼 날아간 거야. 앗! 봐, 여기 새털이 있잖아. 아 이건 비둘기 털이구나. 혹시 네 엄마는 비둘기로 변신한 거 아닐까? 그래,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 두자. 이거? 흠 너 주긴 좀 아까운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야. 자 쭉 마셔. 실론티라는 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야. 붉은 홍차의 꿈이라는 카피가 너무 멋지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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